좋은글

대동여지도엔 왜 독도가 빠졌을까

추억66 2014. 8. 26. 11:50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우리나라의 근대적 측량을 통한 지도 제작은 1890년대 일본 육군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98년에 ‘군용비도(軍用秘圖)’라는 5만분의 1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 지도는 경부선 철도 부설에 얽매인 명목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일본이 비밀리에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근대적 지도가 나오기 전에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지도가 바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조선을 침탈한 일제조차 감탄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즉, 근대적 측량을 통해 제작된 ‘군용비도’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 또한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당시에 대동여지도가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지도는 그의 나이 불과 20대 초반 무렵이었던 1825년경에 제작한 ‘수선전도(首善全圖)’이다. 목판본으로 편찬된 이 지도는 한양의 세부적인 지리를 담은 지도였다.

1834년에 편찬한 ‘청구도(靑邱圖)’는 조선의 과학적 지도 제작법의 전통을 계승해 종합한 전국 지도로서 현존하는 옛 지도 중 가장 크다. 청구도에는 인구 및 전답, 군정(軍丁), 곡식, 별칭, 군현, 서울까지의 거리 등이 세밀하게 기재되어 있다.

1860년 무렵에 편찬된 ‘동여도(東輿圖)’는 채색지도로서, 대동여지도보다 5000여 개나 많은 최대의 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청구도와 동여도를 이른바 김정호의 3대 지도라고 일컫는다.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지만 한성부의 상세지도를 별도로 추가해 놓았다. ⓒ 출처 한국과학사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지만 한성부의 상세지도를 별도로 추가해 놓았다. ⓒ 출처 한국과학사

김정호는 지도 제작과 함께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의 3대 지리서를 편찬했다. 1834년경에 펴낸 ‘동여도지’는 ‘동국여지승람’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한 뒤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1850년대에 편찬된 ‘여도비지’는 18세기 말 정조 때에 이룩한 정보를 확충해 전국 278개 지역의 경도와 위도를 수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동여지도와 짝을 이루어 제작한 ‘대동지지’는 조선 지리서 편찬의 전통과 실학적 지리학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책으로 평가된다. 특히 대동지지의 경우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지리서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풍부하게 기술해 놓았다.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한 ‘대동여지도’는 함경북도 온성에서 제주도까지 22개의 첩으로 만들었다. 즉,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단으로 구분해, 22첩의 지도를 전부 이으면 전국 지도가 되도록 했다. 한 단이 각각 하나의 책자 형태로 나뉘어 제작되었는데, 이 책자 하나를 ‘첩’이라 한다.

또 1첩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 19단으로 구분해 접고 펼 수 있다. 하나의 첩을 접으면 약 20×30센티미터로서 휴대하기 부담이 없는 크기다. 따라서 한 첩에 담긴 지도를 펼치면 한반도의 동서가 펼쳐지고, 연이은 첩을 상하로 잇대면 남북이 이어지는 형태이다. 지도 전체를 이은 크기는 가로 약 3.8미터, 세로 약 6.7미터이다.

 

대동여지도는 축척이 명시된 축척지도

 

대동여지도를 보면 특히 산의 모양이 눈에 띄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산맥으로 이어서 그렸기 때문이다. 산줄기의 굵기를 가늘게 또는 굵게 표현함으로써 산의 크기와 높이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예를 들면 백두대간은 가장 굵게 그리고,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는 한 단계 아래의 굵기로 표현하는 식이다.

물길의 경우에도 단일곡선과 이중곡선의 두 가지로 달리 표현해 놓았다. 즉, 단일곡선의 경우 배가 다닐 수 없는 물길이며, 이중곡선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이다. 이는 여행을 할 때 어떤 물길에서는 배를 타는 것이 가능하고, 어떤 물길에서는 배를 타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대동여지도는 축척이 명시된 축척지도이다. 범례에 가로 8개, 세로 12개의 눈금을 그려 한 칸은 10리라고 명시해 놓은 것. 현재는 10리를 약 4킬로미터로 환산하지만 대동여지도를 만들 당시의 10리는 4.2킬로미터와 5.4킬로미터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따라서 4.2킬로미터로 볼 경우 대동여지도는 16만분의 1 지도가 되며, 5.4킬로미터로 보면 21만6천분의 1 지도가 된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찍음으로써 축척을 지도 내용 속에서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실제 거리의 10리마다 점을 찍음으로써, 산길이나 꼬불꼬불한 길인 경우 점의 간격이 좁으며 쭉 뻗어 있는 곧은 길은 점 간격이 넓다. 따라서 10리마다 찍힌 점의 상태만 봐도 지형적인 조건이나 도로 상태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지도는 크게 두 가지 두드러진 특성을 보인다. 하나는 국가와 관아가 중심이 되어 제작했던 상세한 군현지도이며,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만들었던 전국지도 또는 도별지도이다. 김정호는 이 두 가지 특성의 장점을 취합해 군현지도만큼 상세한 내용을 갖춘 전국지도인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함축적 의미의 독자 기호 사용해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이지만 인구가 많이 모여 있는 수도권 및 서울 시내 지도를 별도로 추가해놓았다. 즉, 도성도와 한성부지도의 상세 지도가 별도로 추가되어 있는 것. 또한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있어 필사할 때 생기는 오류를 최소화한 것은 물론 대량 생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고려했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와 달리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로 보여주어 현대 지도처럼 세련된 모양이다. 능이나 역, 산성 등의 명칭을 기호로 표시함으로써 1만1760여 개의 지명을 간결하게 수록했다. 군현지도처럼 정밀한 내용으로 전국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이처럼 함축적 의미가 들어있는 독자적 기호를 사용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처럼 상세함에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그려져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이를 대동여지도의 단점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도를 그리게 되면 그보다 큰 섬 2000여 개 이상을 지도에 그려 넣어야 하므로 당시 상황의 지도 제작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릴 필요가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대동여지도는 실학적 지식으로서 당시의 국토를 정확하게 체계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부유한 사대부 집안이나 고위 관료도 아닌 그가 30여 년에 거쳐 거의 혼자 힘으로 이 위대한 성과들을 이루어낸 것은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