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워싱턴DC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미국 현직대통령이 정전협정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오바마 대통령 축사의 전문 내용.
"정확히 60년전 오늘, 판문점의 한 허름한 방에서 전쟁 당사국들의 장군들이 펜을 들고 합의문에 서명했다. 그날 밤 정전협정이 발효됐고 전선에서는 더이상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며칠 뒤 교전을 벌이던 양측은 비무장지대를 남겨둔 채 전선에서 철수했다. 우리 군인들은 벙커를 부수고 참호를 에워싼 모래주머니들을 쏟아냈다. 전쟁포로들도 수용소에서 출소했다. 군인들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캘리포니아 금문교 아래를 지나는 순간 한 병사는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집에 돌아왔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나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귀향은 다른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과는 달랐다. 2차대전처럼 미국을 활기차게 만들지 못했다. 환영 퍼레이드를 하며 귀향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베트남전쟁처럼 나라를 찢어놓지도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시위를 벌어지 않았다.
전쟁에 지친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을 잊어버리고 싶어했다. 참전용사들은 "우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군복을 벗고 일하러 갔다. 그것이 전부였다"는 회고했다. 당시 참전용사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아야했다. 우리는 수십년간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고 결국 이곳에 여러분들의 희생이 새겨진 기념비를 세웠다. 여기 미국에서는 어떤 전쟁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떤 참전용사도 소홀히 취급받지 않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당시 한 기자는 "훗날 사람들이 희미한 기억 속에서 한국전을 이야기할 때, (참전용사들의) 빛나는 행동들은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고 썼다. 여러분들의 빛나는 행동들은 분명히 살아남을 것이다. 지금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예우는 60년전 전쟁이 끝난 직후 참전용사들이 귀향했을 때 진작 받았어야할 것이다.
잠깐 바쁜 일상을 멈추고 참전용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 2차대전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시 불려나간 사람들, 사랑하는 부인에게 키스하며 굿바이를 외치던 남자들,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놓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 그리고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러 떠난 젊은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라.
집을 떠난 모든 딸들도 잊을 수 없다. 생명까지 바치며 많은 사람들을 살려낸 영웅적인 간호사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들어보라. 어떻게 병사들이 두려움을 내려놓고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소총을 움켜쥔 채,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적기의 위협을 느끼며 임무를 수행했던 용사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라.
해안에 배를 정박할 때 어쩌면 이 해안을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느끼면서, 또 활주로와 비행갑판 위에서 코르세어와 사브르 전투기가 발진할 때 어쩌면 이 전투기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임무를 수행했던 용사들의 이야기들을 경청해보라.
근대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투의 하나로 평가되는 한국전에서, 종종 수적으로 밀리고 군사력도 열세인 상황에서, 우리 군인들이 어떻게 낙동강 방어선(pusan parameter)을 지켰는지를 생각해보라. 또 어떻게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황을 역전시켰는지를, 어떻게 적에 포위되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엄습하는 상황 속에서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지를, 또 밤낮없이 이어진 '펀치볼(Punchbowl)'과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폭 찹 힐 전투(Battle of Pork Chop Hill)', '올드발디전투(Battle of Old Baldy)'와 같은 주요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들어보라. 혹독한 겨울추위로 무기는 작동조차 되지 않고 음식은 얼음으로 바뀔 정도였다.
상상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 속에서 지옥과 같은 수용소생활을 견뎌낸 미군 전쟁포로들은 우리 조국이 낳은 가장 강인한 사람들이었다.
참전용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불굴의 인간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동정이 있었다. 굶주린 포로들은 서로 음식을 나눴다. 슬픈 유머도 있었다. 박격포의 암호명인 '툿시 롤'을 잘못 알아듣고 같은 이름의 초콜릿 캔디 수천개를 선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는 희망도 있었다. 당시 제7 기갑부대의 한 병사가 집으로 보낸 편지에 따르면 눈과 얼음을 헤쳐나가는 한 젊은 소위는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아기부츠 한쌍을 소총에 매달고 있었다. 첫 아이를 임신한 소위의 부인이 보낸 것이었다. 부인은 남자아이일 경우 파란색 리본, 여자아이일 경우 분홍색 리본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이 병사와 소위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병사는 길에서 소위를 다시 목격했다. 병사의 눈에 아침 햇볕처럼 화사하게 펄럭거린 것이 있었다. 병사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밝고 가장 파란 리본'이었다고 술회했다.
참전용사 여러분들은 이런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국전은 당신들을 강하게 단련시킨 불이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교훈이 되고 있다.
한국전은 우리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공포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2차 대전 직후 급격한 군축으로 미군의 장비는 낙후됐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미군의 로켓이 글자 그대로 적의 탱크를 맞고 튀어나왔다. 그러나 10년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군대를 새롭게 정비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동맹과 적들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전은 우리가 하나로 단결할 때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한국전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군내 인종차별을 금지한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우리 군부대의 인종통합이 이뤄졌다. 그 덕분에 흑인,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출신, 원주민들이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활약했다. 우리는 더욱 완벽한 통합을 향한 긴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통합의 방향을 제시해준 참전용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한국전은 우리 군인들이 참전하고 고향에 돌아올 때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감사를 받을 것임을 분명히 확인시켰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참전 중인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고 돌아올 때 존경과 보살핌, 그리고 여러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한국전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26살때 한국전에서 실종된 윌리엄 로빈슨 중사가 있다.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주 인디언타운 갭에 사는 로빈슨 중사의 조카들은 이번 주에 63년간 실종된 삼촌을 평안히 떠나보내는 행사를 가질 것이다.
자유는 자유롭지 않다. 정전협정이 서명된 날, 일부 사람들은 군인들의 희생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했고 '비기기 위해 죽어야 했나'(die for a tie)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이 여기에 자리잡기까지 수십년이 걸렸지만 참전용사들의 진정한 유업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전쟁은 무승부가 아니었으며 한국의 승리였다. 5천만의 한국인들이 누리는 자유, 활발한 민주주의,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는 억압과 빈곤으로 점철된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승리였으며 한국의 유업이다.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약속이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걸친 우리의 동맹이 지난 60년간 한국에서 확인된 것처럼 평화와 안보, 번영을 위한 세력으로 존속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할 때 그것은 승리이자 한국의 유업이다. 역사는 어떻게 수십년의 냉전기간 동안 자유국가들이 하나로 뭉쳤는지, 어떻게 전쟁을 이겼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소총에 아기부츠를 단 소위의 이야기는 한국전 참전용사들 사이에서 계속 이어져왔다. 지금 많은 분들이 그 군인이 어떻게 돼있는 지 궁금해할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 출신으로 지금 플로리다주 게인스빌에 살고 있는 84세의 리처드 섕크다. 그는 한국전에서의 용맹으로 은성훈장(Silver Star)을 받았다. 그렇다. 딕(리처드의 애칭)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집으로 돌아와 사내아기를 안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딕은 계속 군대에서 복무를 했다. 성장한 그의 아들은 결혼해 아이들을 뒀고 그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돼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다. 많은 미국인 가정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할아버지의 한국전 참전을 자부심있게 얘기하고 있다. 최근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져 부상을 당한 딕은 "인생은 짧다. 그리고 나는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매년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만나 60년전 참전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곤 한다.
여러분들 덕분에 수백만명이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여러분들의 삶은 그 자체로 영감을 준다. 당신들의 희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의 빛나는 행동들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살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