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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쾌걸조로' 홍벽서(유아인 분)가 붉은 삐라, 즉 홍벽서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도 '금등지사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고, 정조(조성하 분)가 실학자 정약용(안내상 분)을 성균관 박사 즉 교수로 파견한 것도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정조가 젊은 유생들인 '잘금 4인방(믹키유천, 박민영, 유아인, 송중기 분)'에게 기대를 거는 것도 그들이 그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참고로, '잘금 4인방'은 여인네들이 오줌을 잘금거리게 만들 정도로 잘생기고 멋진 4인방이란 뜻이다. '잘금거리다'의 사전적 정의는 '소량의 액체가 조금씩 새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자주 언급되는 금등지사는,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자신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나아가 이것은 사도세자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금등지사를 입수해야만, 죄인 신분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나아가 정조의 정치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금등지사가 세상에 공개되면, 영조를 압박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기득권층인 노론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금등지사에 담긴 정치적 함수는 그것이었다. 정조가 이기느냐 노론세력이 이기느냐, 그것이었다.
베일에 싸인 금등지사가 가진 뜻은, 바로 이것
금등지사의 비밀은 드라마 < 성균관 스캔들 > 뿐만 아니라, 이인화의 소설 < 영원한 제국 > 과 안성기 주연의 동명의 영화 < 영원한 제국 > 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럼, 금등지사란 대체 무엇일까?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소설·영화·드라마 등에 의해 잘못 형성된 금등지사 문제에 관한 인식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5대 경전이자 고대 중국의 역사서인 < 서경 > 권7에 금등(金?) 편이 있다. 금등 편은, 조카인 성왕(成王)의 왕위를 탐냈다는 혐의를 받은 주공(周公)이 실제로는 성왕을 포함한 주나라 왕실에 대해 진심 어린 충정을 품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형인 무왕(武王)이 죽은 후에 실권을 장악한 주공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탐냈다면, 그는 조선시대 수양대군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공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외형적'인 혐의와 달리 그가 '내면적'으로 충정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금등 안에 보관된 글' 즉 금등지사였다.
쇠 금(金)과 사슬 등(?)이 결합한 '금등'은 쇠사슬로 꽁꽁 묶은 상자를 가리킨다. 무왕이 살아 있었을 때에, 정확히 말하면 생전의 무왕이 잠시 중병에 걸렸을 때, 주공은 무왕의 쾌유를 비는 기도문을 만들어 금등 속에 넣어둔 적이 있다.
기도의 대상은 죽은 조상들인 태왕·왕계·문왕이고, 기도의 요지는 '나를 죽이고 형인 무왕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당신들의 원손인 아무개(무왕을 지칭)가 모질고 급박한 병을 만났으니, 당신들 세 왕은 …… 저로써 아무개의 몸을 대신하소서!"
여기서, 무왕의 이름을 쓰지 않고 '아무개'라고 표현한 것은, 고대 한국과 중국에는 왕의 이름 즉 휘(諱)를 부르는 것을 피(避)하는 피휘(避諱)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로써 아무개의 몸을 대신하소서!"란 표현은 나를 죽이는 대신 무왕을 살려달라는 뜻이다.
형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주공의 의지가 담긴 금등지사는, 주공이 조카 성왕의 왕위를 탐낼 만한 인물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였다. 다시 말해, 주공은 수양대군 부류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였다. 결국 금등지사의 내용이 공개됨에 따라, 주공은 비로소 혐의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던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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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분위기에 대한 내적 반발심의 표현이었는지, 영조는 주공의 고사를 모방하여 '영조판 금등지사'를 남겼다. '외형적'인 조치와 달리 영조가 '내면적'으로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었다.
나중에 정조가 신하들에게 부분적으로 공개한 영조판 금등지사에는 "천추(千秋, 오랜 세월 동안)에 나는 그리워하노니, (네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라노라"(千秋予懷, 歸來望思)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평소부터 행실에 문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막판에는 반역까지 꿈꾸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직접 죽인 아들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후회하는 것인 동시에 세자의 반역 혐의에 대해 물음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를 죽일 때 영조의 태도는 매우 가혹했다. 그 해 윤5월 13일에 세자를 뒤주(곡식을 담는 상자)에 가두는 처분을 시행하고도 분이 채 풀리지 않은 영조는 세자가 혹시라도 뒤주에서 나올까봐 추가적인 조치까지 취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 한중록 > 에서는 "대처분(뒤주에 가둔 일)을 내린 이틀 뒤인 15일에 대조(大朝, '영조' 지칭)께서는 (밧줄로 뒤주를) 단단히 묶고 (풀 같은 것으로) 깊이깊이 덮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태에서 사도세자는 윤5월 21일에 뒤주 안에서 숨이 끊어졌다. 이렇게 자기 아들을 참혹하게 죽인 영조가 실제로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영조판 금등지사였다.
주공의 금등지사에 비견될 만했던 영조의 친필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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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조는 금등지사를 곧바로 공개하는 대신, 이를 후세에 남기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창경궁 휘령전에서 사관(史官)에게 "자리 좀 비켜달라"고 양해를 구한 뒤에 도승지 채제공과 은밀한 독대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금등지사를 적은 어서(御書, 친필문서)를 건네주면서, 그것을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墓) 내부에 은밀히 보관하도록 했다.
사도세자의 사당 내부에 보관해두면, 마치 금등(金?)으로 꽁꽁 묶인 상자 속에 보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쉽게 찾아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영조의 친필문서는 주공의 금등지사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그럼, 정조는 이 금등지사를 어떻게 입수했을까? 이 문제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 < 성균관 스캔들 > 에서도 정조 임금이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 일련의 비밀작업을 벌였다고 했다. 특히 < 성균관 스캔들 > 에서는 정조가 정약용 및 잘금 4인방의 힘을 빌려 금등지사를 찾으려 했다고 설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젊은시절, 아주 손쉽게 금등지사를 손에 넣은 정조
정조가 금등지사를 입수하게 된 경위는 정조 17년(1793) 8월 8일자 < 정조실록 > 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그 경위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즉위 초기인 병신년(1776) 5월 13일에 문녀(文女)의 죄악을 공포할 때에, 전 영의정(채제공)이 조칙(왕명)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내게) 보고한 바가 있었고, (내가) 승지와 한림을 파견해 그것을 확인하도록 하는 조치도 있었다."
여기서 '문녀'란 영조의 후궁인 문숙의 즉 숙의 문씨를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 한중록 > 에 따르면, 문숙의와 그의 오빠인 문성국은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시키고 세자를 죽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문숙의의 죄상을 공포하는 조칙을 교정하는 작업에 참여한 채제공이 그 기회를 빌려 정조에게 금등지사의 일을 은밀히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지'는 비서를 가리키고, '한림'은 실록 원고인 사초를 담당하는 예문관 검열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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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등극 2개월 뒤인 정조 즉위년(1776) 5월 13일 이후에 있었다. 이때 정조의 나이는 25세였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그는 그렇게 비교적 수월하게 확보했다.
그래서 그는 드라마 속 정조처럼 금등지사를 찾기 위해 젊은 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또 드라마 속의 정조처럼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금등지사를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다. 드라마 내용과 달리, 그의 금등지사 입수는 젊은 시절에 아주 손쉽고 싱겁게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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