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

옛사람들의 차살이

추억66 2008. 11. 27. 13:19
 
 

차 茶|옛사람의 차살이



 

언제부턴가 차는 우리 생활에 스며들었다. 많은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으로 녹차맛을 꼽거나 녹차 시폰 케이크에 열광하며,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인스턴트 커피 대신 티백 차로 하루를 시작한다. 마트나 슈퍼에는 작은 페트병에 든 녹차 음료들이 늘어서 있고, 커피 전문점에서도 차 음료는 커피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녹차는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도 즐겨 마시던 음료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자. 요즘 녹차는 꾸준히 우리 곁에 있어 왔다기보다는, 어찌 보면 느닷없이 등장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일제시대 이후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던 녹차가 본격적으로 일상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무렵. 사실 차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사회적 여건에 따라 쇠퇴와 부활의 과정을 겪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차는 오랜 시간 우리네 삶과 철학을 반영하며 조상들의 삶 속에 어우러진 은은한 향기로 그 흔적을 남겨 왔다.

 

 


중국이 원산지로 추정되는 차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자라기 시작해 언제부터 차로 마시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옛 문헌 속 우리 차의 첫 흔적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는 ‘12월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632~646)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 라고 전한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밭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하동 쌍계사 칠분선원이냐, 구례 화엄사 장죽전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지리산 자락이 차 시배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더 이전부터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진 않지만, 신라에 비해 세련된 문화를 이룩했던 백제나 가야의 차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를 통해 선진 문물을 전해 받은 일본 기록 중에는 불교와 더불어 차문화를 전한 행기스님의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우리의 차 역사를 선덕여왕 때보다 500년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김수로왕이 인도에서 온 왕비 허씨 일행에게 차로 추측되는 ‘난액(蘭液)’을 주었다는 것인데, 『조선불교통사』는 ‘김해의 백원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 라고 적고 있다. 신라 왕실에서 한 뿌리를 가진 가야의 종묘제사를 계속 지내야 한다는 문무왕의 명령에 따라 가락국의 예에 맞춰 ‘세시 때면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 등 여러 음식을 차렸다’는 『삼국사기』 내용은 더 의미심장하다. 차 종주국인 중국의 경우 차가 오랜 기간 약용으로 쓰였던 데 비해, 가락국에서는 이미 떡이나 과일과 더불어 차를 일상의 귀한 음료로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조에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문화가 더욱 번성해 차를 관장하는 정부기관인 ‘다방’을 따로 둘 정도였다. 각종 차례에 대한 기록도 전하는데 조상에 제를 올릴 때나 왕과 신하들이 함께하는 자리 등에 두루 차례를 행했다. 또 무신난 이후에는 권력에서 소외 당한 선비들이 학문과 사상의 교류를 이어가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정성과 시간, 여유와 정신적 고양을 필요로 하는 차는 태생적으로 고급문화에 속해 왔기 때문에 나라가 어려우면 함께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억불정책으로 차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불교계의 영향력이 사그라졌던 조선시대에는 특히 그랬다. 건국 초기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까지 퍼져 있던 차문화는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급격히 쇠퇴한다. 차를 올리던 다모(茶母)가 여자 비밀 형사나 수청드는 시녀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다가 다시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조선문화 18세기 무렵이다. 차에 관해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동다송』을 비롯해 여러 차 문헌을 남긴 초의스님, 차를 마시고 그 맛을 논하기를 즐겼다는 추사 김정희도 이 시대 사람이다.

 

 


고단했던 일제시대에 차문화가 스러지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의 대규모 차밭 조성이 한 원인이었던 것을 보면, 우리 안에서 차의 맛과 멋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 참으로 오랜만인 셈이다. 긴 공백의 시간을 넘어 이어받아야 할 우리 차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차나무 가꾸기부터 차 마시기까지 모든 과정을 행하며 차를 사랑했던 참 다인(茶人), 다산 정약용의 시와 더불어 되새겨 보자.

 

 


금빛 휘장 밖으로 솟은
대장깃발 높이 세우고
게눈과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끓는 모습이 흐릿한 눈에 보이네
가난한 선비는 점심조차 먹기 어려운데
새로 떠 온 맑은 샘물로 부질없이 우전차를 끓이네
신선들의 경지에선 백성근심 묻지 마라
사객가에서 누구와 수액을 나누리
가슴속엔 막히고 걸림이 없다고 자신했는데
맑은 차를 마셔 보니 상쾌하여 다시 자랑할 만하구나



- 다산 정약용이 친구의 차에 관해 화답하며 지은 「햇차」 전문

 

 

 

 

 

글_김정은(자유기고가) 편집_ justinKIM
차에 관한 문헌 기록이나 역사적 사실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차』(여연스님 지음, 현암사 펴냄), 『차 만드는 사람들』(최성민 지음, 김영사 펴냄)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