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음에 완성되는 법은 없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이 장을 만든다. 장을 만드는 이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우직함이라 하겠다. 포항에서도 한 시간여를 더 달려야 만날 수 있는 깊은 산골 죽장면 상사리에는 곧은 마음으로 전통장을 느리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세상에 내보내기까지 1년 넘게 정성으로 보살피며 맛이 들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 '죽장연'에 다녀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자리 잡은 죽장연의 장원. 살랑이는 바람과 햇볕이 하루 종일 장독을 스치며 장을 익힌다.
작은 인연 하나로 시작된 일
바닷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과메기 덕장 풍경을 기대했다. 한데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굽이굽이 산길만 계속된다. 버스 한 대 지나가면 꽉 차는 좁은 길을 구불구불 한참 따라간 끝에야 비로소 포항의 끝자락 죽장면 상사리에 닿았다. 이곳은 고려가 건국한 9세기 말, 신라 귀족들이 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세속으로부터 단절된 은둔처를 찾아 정착한 곳으로, 절개가 대쪽처럼 곧은 선비들이 사는 땅이라 해 '죽장竹長'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산과 계곡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은둔처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곳에 장류업체 '죽장연'의 장원莊園이 자리한다. 동에서 서로 펼쳐진 산자락에 줄지어 선 5천여 개의 항아리 속에서 장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인적 드문 깊은 산골짜기에 장원을 지은 사연이 궁금해 물으니 죽장연의 정연태 대표는 그저 '인연'이라 대답한다.
"포스코POSCO 구내 운송을 담당하는 영일기업이 1999년 '일사일촌 운동'의 일환으로 이 마을과 결연해 농번기 일손 돕기와 농기계 무상 수리, 독거 어르신 집수리 등의 활동을 펼쳤어요. 그때 해마다 보답의 선물로 상사리 주민들이 직접 담근 장을 회사로 보내주셨지요. 그 장맛에 반한 이가 많았죠. 이에 상사리에서 전통장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침내 2010년 죽장연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인연은 계속되어 현재 죽장연의 직원도 상사리 주민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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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스름한 빛을 띠는 콩은 손으로 집어 눌렀을 때 사르르 으깨질 만큼 무르면 알맞게 잘 익은 것이다.
2한 시간을 센 불에서 콩을 삶고 나면 아궁이에서 큰 가지를 빼고, 잔가지를 넣어 뜸을 들인다. 이 불 조절이 장맛을 결정하는 첫걸음이다.
"되는 집은 장맛도 달다"는 속담이 있듯이 곰팡이, 세균, 효모, 이 세 가지 미생물이 발효·숙성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장은 환경과 재료에 따라 그 맛이 모두 다르다. 이는 무엇보다 환경과 재료가 장맛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햇볕, 바람, 물의 도움 없이는 맛있는 장을 만들 수 없는 법. 이 세가지가 잘 갖춰진 지역이 죽장이니, 장원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여기가 백두대간 태백산맥의 끝자락입니다.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동해의 바닷바람과 대륙 분지에서 시작되는 골바람이 만나는 곳이지요. 동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어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들기도 하고요. 저쪽 구암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맛도 기가 막혀요. 이 동네 사람들은 지하수를 그대로 식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은 만들기가 까다롭고 번거롭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재료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콩과 물, 소금이 전부다. 죽장연에서는 죽장과 인접한 지역인 청송, 영양에서 생산한 유기농 콩을 구입해 사용한다. 이 지역은 지대가 높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 농사를 짓기에도 더할 나위없이 좋은데, 알이 굵고 크기가 일정한 콩이 많이 난다.
전통과 현대의 적절한 조화
예로부터 정월에 담근 장을 으뜸으로 여겼다. 추운 정월이라야 쉬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아 장 담그기에 알맞기 때문. 죽장연을 찾아간 날도 장 담그기가 한창이었다. 참나무 장작불위에서 김을 뿜어내는 큼지막한 무쇠 가마솥을 슬쩍 열어보니, 메주를 만들 콩이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콩을 삶은 후 네 시간가량 뜸을 들이는데, 삶는 동안 콩물이 넘쳐 가마솥에 눌어붙지 않도록 쉼없이 닦고, 솥뚜껑 위로 찬물을 부어가며 온도를 조절해야 하기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가스 불이나 전기 스팀을 사용하면 삶는 시간도 훨씬 단축하고 손도 그만큼 덜 수 있지만, 무쇠솥에서 삶는 맛에 비할 수 없어 이곳에서는 전통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
참나무 장작의 은은한 향까지 더해진 무른 콩은 바로 메주를 만들기 위해 메주 건조실로 옮긴다. 죽장연에서는 해마다 2만여 장의 메주를 만드는데, 사람 손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양이라 메주는 모두 기계로 성형한다. 삶은 콩은 기계에 들어가 순식간에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뭉쳐지고, 모서리를 다듬어 나무 판으로 삭둑삭둑 자르면 크기가 일정한 메주가 완성된다.
기온 5~10℃, 습도 40%로 유지되는 메주 건조실. 이곳에서 40일간 말려 표면이 쩍쩍 갈라지면 발효실로 옮긴다.
메주는 건조대에서 하루 정도 말린 뒤 짚으로 엮어 2차 건조실에 매단다. 주렁주렁 줄 맞춰 매달린 메주가 장관을 이루는 이곳은 열마다 작업 기록지를 걸어두어 하루 세 번 온도와 습도를 꼼꼼하게 체크하고, 창문 여는 횟수까지 확인한다. 이곳에서 30~40일간 머물며 단단하게 마른 메주는 발효실로 이동한다. 정연태 대표를 따라 발효실로 들어서니, 한쪽에는 이미 두툼한 짚 이불 속에 곰팡이 꽃이 핀 메주가 가득이다.
"메주가 발효하는 데 이 짚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른 짚에 메주가 바짝 붙어야 바실루스 서브틸리스bacillus subtillis균이 제대로 번식하기 때문이지요. 이 균이 바로 된장의 맛을 만들고, 항암 효과를 내는 세균입니다. 마른풀에서 자라는 균이라 해 고초균枯草菌이라고도 불러요. 메주를 매달 때도 비닐 끈 대신 짚을 엮어 사용하는 것도 고초균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지요."죽장연은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농가에서 유기농 짚을 구해 직원들이 모두 손으로 직접 꼬아 정성으로 엮는다.
이렇게 만든 짚 이불을 메주 위에 덮고 40여 일간 기다려야 장을 담글 수 있는 메주가 된다. 장을 담그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표면에 고르게 곰팡이가 핀 메주를 깨끗한 물에 한 번 씻어 무형문화재 이무남 옹기장의 숨 쉬는 옹기에 차곡차곡 담은 뒤, 정제한 지하 200m의 암반수에 3년간 간수를 뺀 신안 천일염을 녹여 18보메baume로 염도를 맞춘 소금물을 붓는다. 여기에 살균작용을 하는 고추, 숯, 대추 등을 넣어 뚜껑을 닫은 채 50~60일간 두었다가 장을 가르는데, 콩이 완전히 으스러지지 않도록 살짝 찧어 간장과 따로 각각의 옹기에 담아 숙성시킨다.
이곳에서 한 해에 만드는 양은 된장이 1천여 독, 간장은 2백여 독이다. 햇볕 좋은 낮에 직접 빛을 쬐게 하기 위해 열어놓은 된장독을 들여다보니 된장이 배어 색이 발개진 고추씨가 소복하다. 된장 위에 면포를 덮고 올린 고추씨는 벌레가 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된장 맛을 더욱 좋게 하는 역할을 한다. 6개월을 숙성시키면 먹을 수 있지만, 죽장연은 최소 1년 간 숙성시켜 판매하며 2~3년 묵은 것이 가장 좋은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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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장에 빈티지 개념을 더해 세계인의 식탁을 공력할 프리미엄 장을 선보인 죽장연의 정연태 대표.
2숯과 대추, 고추가 바로 천연 살균제와 방부제 역할을 한다.
3전통장의 염도는 18~25보메다. 추운 지역일수록 염도가 낮고, 남쪽으로 갈수록 염도가 높아진다. 경남 지역은 일반적으로 25보메로 염도를 맞추는데, 죽장연은 고지대에 위치해 18보메로 맞춘다. 1보메는 소금이 1%라는 뜻이다.
4짚 이불을 덮어 곰팡이가 고르게 핀 메주. 장을 담그기 전 일일이 손으로 씻어 항아리로 들어간다.
5이 지역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고추의 씨를 된장 위에 덮어두는 것이 맛있는 죽장연 장의 비결이다.
빈티지 장의 탄생
메주 건조실에 걸어둔 기록지가 장원에도 눈에 띈다. 여기서도 매일매일의 기온과 습도, 날씨를 자세히 기록한다. 인공감미료, 화학조미료, 향미증진제 등 화학 첨가물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그저 자연과 세월의 손길로 장을 익히기 때문에 매해 안정적인 품질의 장을 생산하기 위해 비교 자료로 활용하는 것. 또 이를 통해 와인처럼 매해 생산되는 장의 품질과 특징을 알아보는 빈티지vintage 개념을 도입했다. 이곳의 빈티지 기준일은 매년 정월 장 담그는 날로 1년산, 2년산, 3년산 등 프리미엄 전통장을 만든다. 정연태 대표는 죽장연의 이러한 시도가 장을 고급화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장의 세계화에도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뉴욕에서 미슐랭 스타를 받은 한식당 '단지'의 후니 킴셰프가 이곳을 직접 찾아 장맛을 본 뒤, 그의 레스토랑에서 죽장연의 장을 쓰고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레스토랑과 백화점에서도 죽장연의 장맛을 볼 수 있고요. 인도네시아, 뉴질랜드에도 곧 진출할 예정입니다. 이는 장맛과 품질이 밑바탕이 된 것이지만, 어디서도 맛본 적 없는 빈티지 장이 외국 시장에서 시선을 끈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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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독을 분양해 대신 장을 담그고 관리해 3개월마다 장을 배달해주는 죽장연의 독 분양 시스템. 가정이나 레스토랑의 한 해 살림이 이곳에서 숙성된다.
7태양초와 메줏가루, 찹쌀가루, 조청, 물로만 만드는 죽장연의 고추장.
8숙성 중인 간장. 표면에 뜬 흰 곰팡이를 "메밀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꽃이 예쁘게 피어야 맛있는 간장이 된다.
9죽장연의 2011 빈티지 된장.
10전통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죽장연에서 쓰는 것과 동일한 재료로 구성한 '장 담그기 세트'도 판매한다.
올해 가을에는 죽장연이 위치한 상사리의 폐교를 된장학교로 꾸며 전통장을 직접 만드는 체험 학습장과 텃밭, 숙박 시설과 이곳의 장을 활용한 레스토랑 등 일반인에게 전통장을 알리기 위한 문화 공간을 조성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장맛을 내는 것이 자연과 세월의 몫이라면, 장을 널리 알리는 것은 저와 저희 직원들의 몫입니다.
전통 방식을 고수해 장을 담그지만, 현대인의 마음을 공략하려면 유연한 사고가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현대적이고 위생적인 시설에서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는 이곳 장원처럼 말입니다. 전통장을 다양화, 고급화, 브랜드화하려는 계획을 진행 중입 니다. 죽장 지역의 특산물인 고로쇠 수액으로 담근 고로쇠 된장이나, 건강에 관심이 높은 요즘의 트렌드에 맞춰 염도를 더욱 낮춘 장도 선보이기 위해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죽장연 정연태 대표의 말에서 전통장의 화려한 미래가 엿보인다. 항아리에 담긴 장의 맛은 하루도 같은 법이 없다. 매일 볕을 쬐고, 비바람을 맞으며 차츰차츰 맛이 깊어지는 것. 죽장연의 사람들도 그렇다. 이토록 정성을 다해 만든 전통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들의 손과 발은 쉬는법이 없다. 느리지만 충분히 빠른 사람들이 이곳에 산다.
기자/에디터 : 박유주 / 사진 : 이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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