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금수강산

민초의 한이 서린 길, 보성 소릿길..

추억66 2011. 5. 24. 00:35

 

'녹차 수도' '판소리 서편제의 고향' '소설 < 태백산맥 > 의 무대'. 전남 보성군을 상징하는 수식어들이다. 이 세 가지를 잘 아우르면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길이 하나 있다. 보성군 회천면 봇재마루에서 탁 트인 전망을 따라 양동·영천·도강재·회령 마을에 이르기까지 굽이굽이 내리감아 도는 약 7㎞의 걷기 길이다. 일명 '소릿길'이라고도 부르는 이 길은 굴곡진 현대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피멍 든 민초의 한이 서편제 판소리로 승화된 길이다.

걷기 여행의 출발지는 봇재마루로 잡았다. 봇재는 각종 영화와 CF 촬영지로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여행지로 자리매김한 보성읍 봉산리 소재 대한다업에서 가깝다. 흔히 보성 '녹차 길'을 찾는 여행자는 대한다업만 알고 온다. 벨벳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녹차 밭, 병풍처럼 둘러싼 삼나무 숲, 곳곳에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알리는 표지판과 지방자치단체의 대대적인 단장 및 홍보 때문일 터이다.





ⓒ이준석(http://blog.daum.net/sannasdas) 제공 보성 대한다업(위)에 가면 벨벳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녹차 밭을 볼 수 있다.

봇재마루에서 절로 탄성이…

그러나 연출된 아름다움 뒤에 숨은 보성의 참맛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인공으로 꾸며놓고 북적대는 대한다업에만 머물다 돌아설 일이 아니다. 대한다업 입구에서 국도 왼쪽의 회천·율포 방면으로 100m만 걸어가면 앞이 탁 트인 고갯마루가 나온다. 해발 230m 봇재 정상이다. 서울에서 광주·보성에 이르기까지 평지를 내달려온 길 끝이 갑자기 수백m 낭떠러지와 마주하는 듯한 봇재마루에 서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등고선마냥 녹차 이랑이 층층이 휘감은 산과 멀리 푸른 득량만 바다와 섬들, 그리고 그 사이의 논밭과 영천지 호수가 어울려 한 폭의 비경을 이룬다. 그 장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여정은 도보라야 제맛이다.

봇재마루 바로 밑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10여 분 걸어 내려가면 영천리 양동마을이다. 이 가파른 산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걷는 이들을 위해 따로 푹신한 아스콘을 깔아둬 부담이 덜하다. 등고선 모양으로 빙 늘어선 녹차 밭 이랑이 보폭을 아래로 옮길 때마다 따라 내려와 즐거운 눈맞춤을 해준다.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녹차의 상처가 심해 안쓰럽다. 4월이면 한창 초록색에서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을 시기인데도 녹차 잎이 사뭇 검붉다. 사상 유례없었다는 지난겨울 한파가 녹차 밭을 사정없이 할퀴고 간 탓이다.





ⓒ시사IN 정희상 봇재마루 정상(위)에서는 멀리 득량만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단숨에 해발 100m가량 내려온 길은 양동마을을 지나 큰 저수지 위에 자리한 영천마을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양동과 영천마을에서는 기계로 딴 대규모 차 밭의 시음 차보다는 수작업을 하는 농민들의 땀과 정성이 밴 차를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마을 어귀 곳곳에 녹차 시음장과 녹차 우리는 연습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커다란 장독 100여 개가 놓인 길가 '녹차된장집'에서는 구수한 된장 냄새가 길손을 유혹한다. 4월 중순의 이 소릿길은 소나무와 녹차, 동백꽃, 대나무 숲 등 남도 특유의 식생이 한데 어우러져 이방인에게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봇재마루에서 남도 판소리의 성지라 불리는 도강재마을까지는 약 4㎞. 영천저수지 둘레로 이어지는 영천마을 길을 굽이굽이 따라 20분쯤 걸어 내려가면 도강재마을이 나온다. '한국농어촌공사 영천저수지'라고 쓰인 제방 아래로는 바닷가까지 폭 1㎞, 길이 3㎞가량 탁 트인 논밭이 펼쳐져 있다. 이 벌판에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상인들이 전국에서 으뜸으로 쳐준다는 이 고장의 명물 회천 쪽파와 회천 감자가 한창 푸른색으로 들녘을 수놓고 있다. 도강재마을에 이르는 길가 다랭이 밭에서는 막 이삭이 팬 보리와 유채꽃 위로 봄 아지랑이가 현란하게 춤을 춘다.





ⓒ시사IN 정희상 소릿길 7㎞에서는 소나무와 녹차, 동백꽃, 대나무 숲 등 남도 특유의 식생을 만날 수 있다.

도강재마을에 들어서니 '보성 소리 명가'라고 쓰인 간판을 단 솟을대문이 보인다. 서편제 판소리의 대가 송계 정응민 선생(1896~1963)의 생가이다. 솟을대문을 넘어서자 높은 석축 위에 앉은 '송계초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당 옆에는 소리할 때 장단을 맞췄다는 북바위가 있다. 마당에는 소리북 형태의 예적비가 있다. 예적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 소리 다시 피어나는가. 그 소리 묻혀지지 않고 아직까지 토해내는데 매양 희다 재운 소리로 기개 있게 그 한풀이 풍류에 서툴지 않던 임이시여, 초승달 뜨면 달을 향해 무릎 꿇고 갓 쓰고 큰절하고 초승달같이 행신하라 가르치신 임이시여…."

1950년대 정응민 선생의 도강재 집에는 소리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2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송계에게서 소리를 배운 정광수·성우향·성창순·조상현 등은 1970년대 이후 한국 판소리계의 중추가 되었다. 제자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봇재를 넘나들며 득음에 이르려는 원이 담긴 소리를 줄기차게 연습했고, 1950년대 내내 그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시사IN 정희상 도강재마을에 동백꽃이 떨어졌다.

'통곡의 길'이기도 한 소릿길

정응민 선생이 전국의 제자들에게 서편제 소리를 전수하던 시절은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 서편제 > 의 소릿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이 지역 민중이 감당해온 한 많은 근·현대사와도 고스란히 맞물린다.

회천면은 전남 보성의 남쪽 끝에 있는 바닷가 고장으로 보성만을 사이에 두고 고흥과 마주한다. 제암산과 사자산·일림산을 경계로 장흥과 보성을 가른 호남 정맥은, 다시 북동진하여 일림산과 활성산으로 솟구치면서 남쪽으로 회천 땅을 감싸듯이 버티고 서 있다. 이처럼 해안지대에서는 보기 드문 깊은 산세를 지닌 탓에 회천은 1948년 여순 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토벌대에 패한 여순 지역 주둔 14연대 반란 패잔병들이 산세를 따라 봇재 너머 활성산(봇재)과 일림산으로 들어오면서 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밥을 해준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토벌대에게 학살당했다. 또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이른바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던 200여 명의 보성·회천 지역 청년이 경찰에 체포되어 봇재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생때같은 젊은 목숨, 남편이요 자식이요 동생이요 오빠를 그렇게 잃은 수많은 지역 민초에게 봇재로 이어지는 서편제 소릿길은 통곡의 길이었다. 이후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주는 노동요의 한 자락이 서편제 소리가 되기도 했다.

인근 마을에 생존해 있는 빨치산 출신 토박이 할아버지로부터 지역 내 아픈 역사와 사연을 듣고 정응민 선생 생가를 나왔다. 도강재마을은 동백나무가 지천이다. 때마침 붉은 동백꽃이 통째로 뚝뚝 떨어지는 4월 중순, 그 꽃더미 위로 비극과 수난의 현대사가 겹친다. 붉은 꽃 위를 그냥 지나다니는 차들 때문에 군데군데 아스팔트가 검붉은 핏자국마냥 꽃물에 젖어갔다. 그날도 그랬으리라, 저 넘어 봇재에서 동백꽃 같은 젊은 목숨이 저렇게 스러졌으리라.

도강재마을을 벗어나니 마을 입구 큰 정자나무와 '서편제가든'이라는 식당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길은 국도와 합류한다. 오른쪽으로 700m쯤 따라가면 회령마을 회천서초등학교 앞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남쪽 끝에 반짝이는 게 보성만 바다다. 금당도와 소록도·완도 등의 섬을 휘감으며 밀려 들어온 바다는 이곳에 와서 호수만 해진다. 이곳 산천에서 사람들은 무시로 굿을 올렸고, 그때마다 춤과 노래와 악기로 화해와 갱생의 다리를 놓던 영매자(靈媒者)는 다름 아닌 전라도의 소리꾼들이었다.





이 해안 뒤로 해발 667m의 일림산 산세가 약 15㎞에 걸쳐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해마다 5월 초순에 열리는 '철쭉제'로 유명한 호남 정맥의 명산 일림산을 오르는 길은 회령에서 서북 방향으로 난 봉서동 길을 택하면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녹차 소릿길'을 주제 삼아 찾아왔으므로 동북 방향으로 난 삼장마을 길을 택했다. 삼장마을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잘 단장된, 그러나 보성읍 대한다업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대규모 평지형 녹차 밭이 있다. 20분쯤 걸어서 도착한 녹차 밭은 역시 풍경이 장관이다. 이렇듯 도시 사람에게 흔히 녹차 밭은 아름다운 장관으로, 다도는 일상과 거리를 둔 숭고한 예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도의 한이 서린 이 판소리 길에서 차 재배와 다도는 일상이고 땀이며, 정성이다. 녹차 농민의 일상은 그래서 숭고하다. 아름다움 뒤에 숨은 역설의 풍경은 이렇게 말한다. '늘 겸손하게 살라'고.

먹을거리
봄 바지락회, 여름 서대회






청정 해역 득량만과 해발 700m에 이르는 일림산에 둘러싸인 보성군 회천면 일대는 예로부터 육·해·공 식재료가 풍성했다. 득량만에서 생산되는 키조개와 새조개, 바지락은 이미 1970년대부터 거의 전량 일본으로 수출될 만큼 맛과 영양이 뛰어났다. 입맛과 오염 기준치 측정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인들이 탐낼 정도이니, 그 깨끗함과 맛은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맘때면 바지락회(사진)·주꾸미회가 입맛을 돋우고, 여름과 가을에는 율포와 회령마을(5일장이 서는 곳) 곳곳에 자리한 식당에서 서대회(여름)와 전어회(가을)를 선보인다.

해산물뿐만이 아니다. 녹차의 고장답게 찻잎을 먹여 키운 돼지고기 또한 인기다. 이미 '보성녹돈'이 전국적 브랜드가 되어 곳곳에서 '보성 녹차 먹인' 돼지고기를 맛볼 수 있지만, 역시 그곳에서 난 식재료는 그곳에서 먹어야 제 맛이다. 보성을 찾은 '뚜벅이'들에게는 봇재마루와 회천 면소재지가 있는 율포해수욕장 주변의 식당을 추천한다. 오래 걸어서 팔다리가 쑤시거나 뻐근한 사람에게는 율포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해수녹차탕'을 권한다.

정희상 기자 / minju518@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