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겨울에도 꽃 피는 깊은 산속 꽃대궐

추억66 2009. 12. 10. 10:09

꽃나무 피는 마당

겨울에도 꽃 피는 깊은 산속 꽃대궐

 

 

『행복한 정원&즐거운 살림』 저자 이현주의 마당

경기도 광주시 목동에 자리한 나뭇골. 분당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그렇게 산세 좋은 곳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긴 세월 아파트에서 살면서도 항상 땅을 밟으며 사는 걸 꿈꿨던 이현주씨는 10년 전 이곳에 터를 잡고 드라마틱할 만큼 아름다운 정원을 완성했다. 큰돈 들인 정원과 주인장의 손길로 일군 정원은 확실히 다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극한 정성으로 만든 그녀의 보타닉 하우스는 구획 정리와 정돈은 확실히 돼 있지만 기계적이지 않아 사람 맛이 나고, 하나하나 주워 모은 돌들로 만든 나지막한 화단도 높낮이가 자연스럽게 들어맞아 율동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온갖 꽃들 즐비한 화단이 길 양쪽에 있고, 6월이면 장미 넝쿨이 휘감은 아치가 정면에 보인다. 이 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 키가 큰 노란 목련(노란 새가 앉은 것 같다고 해서 옐로 버드로 불린다)과 불두화(꽃 모양이 부처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가 힘 있게 서 있다. 집 안 거실에서 바라볼 때 내다보이는 뒷마당에는 파라솔이 있는 데크를 두어 여름이면 바비큐 파티를 벌인다. 6월이면 이 집 뒷마당은 초록으로 물든 산을 병풍처럼 지고 앉을 테고, 마당의 수많은 꽃들은 더욱 또렷하게 보이겠지.

 

 

 

아파트 1층 앞뜰에 꾸린 소박한 꽃밭

 

 

자연생태박물관 교사 지경옥의 마당

부천식물원과 자연생태박물관에서 자원봉사 교사 일을 하고 있는 주부 지경옥씨. 네이버 블로그 ‘지지의 행복한 세상 ’을 운영하며 자신이 가꾼 꽃밭 자랑하는 일에 신바람을 내며 살고 있다. 이름도 꽃같은 부천 상동 진달래 마을에 자리한 그녀의 마당은, 아파트 1층에 살면서 덤으로 얻은 미니 정원이다. 4년 전, 이 공간이 마음에 들어 이사 온 후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심히 일궈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예쁜 꽃밭과 어울리게 바깥채로 드나드는 문도 내고, 오래 보고 싶은 꽃이 있으면 악착같이 구해 심고, 사계절 내내 쉴 때 없이 꽃구경 할 수 있게 꽃씨도 자리 정해 뿌렸다. 튤립 지면 아이리스, 아이리스 지면 작약과 넝쿨장미…. “어려서부터 정원 가꾸는 걸 보며 자란 애들이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야말로 1층 앞마당이 자연 생태 학습장인 셈이죠. 특히 둘째는 풀 한 포기도 제 동생인 양 구는 게 귀여워요.” 지경옥씨네 아파트 근처에는 이렇게 1층 마당을 정원으로 꾸미는 집이 유난히 많다. 서로 예쁜 꽃씨나 모종이 생기면 나누고, 불쑥불쑥 바깥으로 난 출입구를 통해 남의 집 마당 구경을 가기도 한다. 꽃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있겠나. 이 작은 정원에도 필 꽃은 다 피고, 질 꽃은 다 지더라.

 

 

 

보일 듯 말듯, 수줍게 야생화 핀 한옥 정원


 

차 연구가 김현숙의 마당

한옥 마을인 서울 종로 가회동에서도 예쁘기로 소문난 한옥집 ‘올물’은 차 연구가 김현숙씨가 차를 공부하고 즐기는 다실로 만든 곳이다. 찬바람 부는 계절에도 ‘초록’을 뽐내는 인동초 덩굴이 담벼락을 덮고 있고 새봄엔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 대여섯 평 남짓한 좁은 ‘ㅁ’자 마당은 갈 때마다, 때때마다 볼거리가 풍성하다. 관상용(!) 네모 우물도 있고 불 피우는 작은 솥단지도 있고, 이끼 낀 돌확도 있는 그림처럼 예쁜 마당엔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으니 토종 야생화들이다.

 

꽃망울이 너무 작아 사진 속에 보이진 않아도 방울로 피는 하얀 둥굴레꽃과 보라 제비꽃, 순박한 매발톱 꽃이 보일 듯 말듯 그야말로 수줍게 피었다. 이름도 예쁜 야생화들은 살필수록 마음이 간다. “모란이 지고 나면 이 자잘한 야생화들이 눈에 들어와요. 저 구석에 있는 건 애기똥풀인데, 벌써 꽃이 질 때인데 응달에 심었더니 이제야 피네요. 며칠 지나면 담벼락에 올라온 인동덩굴에 꽃이 만발할 테니 구경 오세요. 마치 꽃들이 모여 꽃을 이룬 것 같은 게 얼마나 고운지 몰라요.” 맛 좋은 차와 쑥떡을 소반에 차려 내주며 김현숙씨가 곱게 웃는다. 그 모습이 꼭 마당의 야생화 같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고 지는 정원


박물관 ‘얼굴’ 관장 김정옥•조경자 부부의 마당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팔당호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박물관 ‘얼굴’ 관장 김정옥씨와 부인 조경자씨의 돌집이 있다. 이 집 곳곳에는 부부가 새끼처럼(?) 아끼는 나무며 꽃들이 그득하다. 지금이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거목들이 됐지만, 40년도 훨씬 더 된 옛날 그 나무들은 모두 잎이었고, 가지였단다. 특히 마당에 있는 큰 주목은 아들 낳던 해 어린 가지 하나를 얻어다 조경자씨가 직접 삽목(揷木-꺾꽂이)한 거라 의미가 크다. 짬 나는 대로 집 근처 농원에 가서 정원사의 어깨너머로 원예에 대해 배워가며 가지와 잎을 구해다가 직접 심고, 가지치기까지 모두 조경자씨 혼자 힘으로 해가며 키운 새끼 같은 나무들이다. 이렇듯 오랜 세월에 걸쳐 가꾼 마당에는 지인들이 힘을 보탠 귀한 꽃들도 여럿 눈에 띈다. 지금은 돌아가신 김정옥 관장의 어머니께서 꽃이 좋아 평생을 키우셨던 영산홍이 있는데, 지나온 세월만큼 보통의 영산홍보다 훨씬 대가 굵다. 또 무엇보다 이 집 마당의 하이라이트는 집 돌담 옆길, 아기 얼굴처럼 큰 모란꽃 무리다. 김영랑 시인의 사촌 동생인 여학교 동창이 아버지께 물려받은 모란을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조경자씨에게 부탁했다. 잎들 사이에서 튀어나올 듯 진한 빛을 내는 모란을 보고 있노라면, 김영랑 시인이 왜 삼백 예순 날 모란이 피기를 기다렸는지 알 것 같다나.

 

 

 

꽃들에게 말 건네는 노년의 놀이터


 

‘꽃 할머니’ 박완서의 마당


“아는 분이 우리 마당에 어떤 꽃들이 피는지 물었다.

나는 으스대며 백 가지도 넘는 꽃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누구한테나 그렇게 말하는 내 말버릇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아니다.

듣는 사람은 아마 백화난만한 꽃밭을 생각하겠지만

그것들은 한꺼번에 피지 않고 순서껏 차례차례 핀다.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는 목련부터

눈에 띄지도 않는 돗나물 꽃까지를 합쳐서 그렇다는 소리다.

그런데 어떻게 그 가짓수를 다 셀 수 있느냐 하면

그것들은 차례차례로 오고, 나는 기다리기 때문이다.”


-박완서 산문집 『호미』(열림원) 중에서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호미』를 읽으며 그의 정원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 기자가 그린 박완서 작가의 정원은 백 가지도 넘는 꽃이 빼곡하게 자리해, 웅크리고 앉아서 고개만 돌리면 새 꽃을 만나고, 또 새 꽃을 만날 것 같은 꽃천지였다. 독자들에게 올봄 마지막 꽃구경 한 번 시켜주자고 청하는 기자에게 작가는 “봄꽃 다 지고 여름 꽃 피기 전이라 자랑 삼아 나가기엔 초록만 가득하다”며 마당을 감췄다. 그 후 몇 번의 설득에도 꿈적 안 하는 작가를 너무 괴롭히는 거 아닌가 포기하려 했지만, 수도 없이 상상했던 꽃천지를 포기할 수 없어 초록이어도 괜찮다며 아침 댓바람부터 대문을 두드렸다. 나이 먹으니 피곤해 손님 치르는 일 귀찮다더니, 괜찮다는데도 한사코 마당에 있는 매실 나무 열매로 만든 음료라며 매실냉차와 알알이 포도도 씻어 내준다. 일흔여덟의 소녀 같은 할머니는 그러는 사이 자신이 쓴 글과 어울리게 말랑말랑해져 정원으로 손님을 끌었다.

 

역시 한눈에 보기엔 초록이 맞았다. 하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꽃들을 보니 워낙 미약해 없는 듯 보인 것이지 분명 거기 있었다. “이게 물망초예요. 이건 나만 보는 꽃이에요. 여기 숨은 거 사람들은 잘 못 봐. 그래서 나만 봐요.” 자랑할 것 없다던 마당 주인은 그때부터 수다쟁이 할머니가 됐다. “오늘 아침에도 1시간 얼른 나갔다 왔잖아요. 여름엔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낮에는 못 나가니까 아침에 무지 바빠요. 잡초들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매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며 싸움질해야 한다니까요. 대문 옆에 핀 큰 꽃은 으아리, 저기 봉오리 진 건 작약, 모란은 벌써 피었다가 졌고, 요기, 요기 있는 게 붓꽃이에요. 올봄 목련이랑 매화랑 조팝나무가 한창 예뻤는데 이제 다 졌지 뭐. 어머, 벌써 봉숭아 올라왔네.” 박완서 작가는 자기네 마당이 가꾼 티 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한겨울 빼고는 사철 꽃이 피어 보기에도 좋고, 마음에도 위안이 된다고 했다. 또 남들한테 마당이 예쁘다는 칭찬도 듣고 싶다며 목련처럼 아주 활짝 웃었다.

 

 

 

기획 정미경 기자

사진 문덕관, 박재석, 이진하 기자 / studio l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