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간식·먹거리

농익은 김치의과학

추억66 2009. 1. 15. 11:31

유산균의 김치발효

“풋내 나는 겉절이 인생이 아닌 농익은 김치 인생을 살아라. 그런데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서 또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 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낸다. 그 깊은 맛을 전하는 푹 익은 인생을 살아라. 그러기 위해 오늘도 성질, 고집, 편견을 죽이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황소 고집통 분들에게 당부하는 글이다.

 

 

 

여태 후텁지근한 여름기가 감도는 팔월 초순경에, 텃밭에다 무와 배추를 심었더니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김장감이 되더라. 참 장하다! 통배추엔 샛노란 고갱이가 그득 차고, 무는 미끈한 게 장딴지만큼 컸으니! 바로 옆에는 나중에 김치 만들 때 친구가 될 고추가 연신 익어가고 있다. 햇볕에 바짝 말리고 곱게 빻으면 매콤하니 맛있는 고춧가루가 될 거다. 잎사귀에다 나비와 나방이가 하도 알을 슬어대 농부는 애벌레 녀석들 잡느라 곱사등이가 되었지. 새~끼들! 농약을 확 뿌려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들이 먹는 곡식과 채소, 과일엔 농부의 뼈아픔이 배어 있는 것.. 스님들은 한 톨의 알곡을 사리골(舍利骨)로 여긴다고 하지 않는가. 자고로 음식의 고마움을 모르면 천벌을 받는다.


  

 

 

농사를 지으면서 밑에는 무가, 위에는 배추가 떡 하니 자라는 상상의 채소를 꿈꾼다. 밑에는 감자가 열리고 위에는 토마토가 대롱대롱 달리는 그런 식물처럼 말이지. 아무래도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는 일이라 마음이 꺼림칙하지만. 그런데 무를 심는 뜻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안다. 그렇다. 무도 먹고 무청도 먹겠다는 것이다. 늦가을 서리 내릴 무렵 무 머리에서 자른 퉁퉁하고 때깔 좋은 푸른 무청을 새끼로 엮어 그늘에 널어 말린 것이 시래기다. 시래기는 소죽 삶듯이 오래 푹 삶아 물에 우렸다가 시래기나물, 시래기찌개, 시래기 국 등 여러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 그 중에서도 시래기 국은 시래기에 쌀뜨물과 된장을 걸러 붓고 통 멸치를 넣어 끓인 국이다. 국에다 밥을 통째로 말고 익은 김치를 턱턱 걸쳐 먹었으니, 먹을 것이란 사실 그것이 모두였다.

 

  

 

김장은 ‘침장(沈藏)’에서 유래했다 하고, 김치도 침채(沈菜)에서 나왔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바뀌었다고 한다. 김치는 누가 뭐래도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금강초롱이나 열목어는 우리나라에만 나는 고유종이라 하지 않는가. 말 할 필요 없이 김치 발효의 주인공은 미생물로, 발효식품에는 김치를 비롯하여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젓갈류, 술, 식초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미생물들도 있지만 알고 보면 거의 모두 유익하다.

 

김칫거리는 배추나 무가 주지만 열무, 부추, 양배추, 갓, 파, 고들빼기, 씀바귀 등 일흔 가지가 넘는다. 어디 김치를 배추 하나 만으로 만드는가? 무를 숭덩숭덩 잘라 채를 치고, 마늘, 생강, 고춧가루, 소금, 간장, 식초, 설탕, 조미료 등 갖은 양념은 기본. 아미노산이 그득한 멸치젓, 어리굴젓, 새우젓에다 호두, 은행, 잣 등의 과일류는 물론. 생고기인 북어, 대구, 생태, 가자미들까지 넣는다. 생선 단백질이 발효된 것이 젓갈이고, 김치에서도 그런 과정이 일어난다. 김치를 마냥 절인 푸성귀 정도로 여기지 말지어다. 여러 비타민에다 고른 영양소, 유산(젖산)까지 그득 들어있는 종합 영양 식품인 것. 게다가 김치가 사스(SARS), 조류독감바이러스(AI)까지 잡는지라 세상 사람들이 홀딱 반해 난리들을 피운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이 김치에서 찾아도 좋다. 힘 줘 말하지만 김치를 먹지 않으면 한국인이 못 된다. 우리가 꿀릴 게 뭐가 그리 있는가. 몸에서 마늘, 김치 냄새 좀 나면 어때… 쓸데없이 뻐기는 자만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긍심,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한다는 것.


 

  

 

 

이제 김장을 할 차례다. 배추에 소금을 듬뿍 뿌려 착착 포개 밤샘을 하고 나면 적당히 절여지면서 숨이 죽는다. 농도가 짙은 바깥으로 물이 빠져 나오니 세포에 ‘원형질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소금 먹은 배추를 일일이 맹물로 깨끗이 씻는다. 앞의 여러 김장거리를 매매 버무려서, 배춧잎 한 장 한 장 들쳐 사이사이에 척척 집어넣어 예쁘게 오므린 다음 독에다 차곡차곡 눌러 담는다. 대부분의 미생물은 소금에 절일 때 죽어버리지만 염분에 잘 견디는 내염성 세균 인 유산균(乳酸菌, 젖산균, lactic acid bacteria)들만 남아서 김치를 익힌다. 두말할 필요 없이 채소에 묻어있던 미생물들이 발효의 주인공들이다. 김치를 김칫독에 넣고 김칫돌로 꼭꼭 눌러 공기를 빼낸다. 김치에 사는 유산균들은 산소가 있으면 되레 죽어버리는 혐기성세균 이기에 산소를 다 없애버린다. 즉, 염분에 견디면서 산소를 싫어하고, 낮은 온도를 좋아하는 유산균들 만이 살아남는다. 참고로, 여행 가서 김치를 며칠 먹지 못하면 그것 생각이 무척 난다. 그럴 때는 유산균이 많이 든 요구르트를 먹으면 욕구를 덜게 된다. 김치 국물에 든 젖산과 요구르트의 것이 비슷한 탓이다.

  

 

 

독 안의 유산균들이 천천히 번식을 하게 되니, 이게 ‘김치발효’다. 그렇지 못 하고 세균들이 재료를 썩힐 때 ‘부패’라고 한다. 채소나 양념에 든 양분을 이용하여 유산균이 번식하면서 유기산을 많이 내 놓으니 이것이 침을 나오게 하고, 김치의 특유한 맛과 향을 낸다. 이때는 다른 미생물들은 힘을 못 쓰고 유산균들만 판을 치니 말 그대로 유산균세상으로, 물론 한 종의 유산균이 아니고 여러 가지 유산균들이 득실거린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 이런 상태가 얼마 지나다 보면 산도(pH값)가 떨어지면서(시어지면서) 어느 순간 이들 유산균들이 맥을 못 추고 시들시들해지는 때가 온다.


아주 잘 익은 김치에는 유익한 유산균이 99%요 다른 세균이나 곰팡이가 1% 정도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치가 시어지면서 유산균이 점점 죽어서 줄어들고, 따라서 여태 꼼짝 못하고 숨어 지내던 곰팡이무리(효모)들이 득세하면서 김치에서 군내가 나고 국물이 초가 되어간다. 일종의 부패다. 그러므로 아주 시어진 묵은 김치, 묵은지(漬,김치)에는 유산균이 다 죽는다. 

 


이제는 한국 사람들의 반 정도, 아니 그 이상이 아파트에 살지 않을까? 큰 탈났다, 겨울에 김칫독을 어디에 묻는단 말인가? 앞에서 유산균은 온도에 민감하다 했다. 그래서 온도를 낮고 일정하게 유지하여 유산균들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을 개발하였으니, 세상에 없는 ‘한국고유종’인 김치냉장고다. 김칫독을 응달에 묻었을 때 겨우내 독 속의 온도가 거의 변하지 않고, 영하 1℃ 근방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흉내를 낸 것이 김치냉장고라는 발명품 아닌가! 하긴 여느 발명품치고 필요의 산물 아닌 것 없고, 자연을 모방하지 않은 것 없다!

  

 

 

그렇다, 묵은지에 침이 동하는 것은 한국인의 특유한 김치유전자가 발현한 탓이다. 그 유전물질을 갖지 못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냄새에 코를 막고 구역질을 한다. 아무튼 이렇게 김치 하나에도 푹 익은 발효과학이 들어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직은 김치에 살고 있는 미생물을 세세히 다 알지 못하고 있다. 오묘한 미생물의 세계라, 김칫독 안의 생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것을 다 알아낸다면 그 세균들을 순수분리하고, 잘 키워서 김치 담글 때 넣어주면 더 맛있는 김치, 시지 않는 김치 맛을 볼 수도 있을 텐데. 김치의 비밀 하나도 제대로 밝히기 어렵다 하니 ‘자연에 숨어있는 비밀’은 정말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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