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간식·먹거리

추억66 2009. 1. 2. 13:26



 

떡은 별식이다. 주식으로가 아니라 특별한 날 만들어 먹는 별식이다. 별식이면서 일년에 몇 차례 있는 명절, 생일이나 혼례, 제사 등의 통과의레에 결코 빠져서는 안되는 특식이다. 특식인 만큼 영양소나 색이나 아름다움도 특별하다. 특별하지만 아주 후한 특식이다. 명절을 치르고 돌아가는 일가친척들이나 백일잔치에 온 지인들의 빈손을 채워줄 만큼 넉넉하다. 그러니 떡은 넉넉한 나눔의 미덕을 갖춘 아름다운 특식인 게다.

아이가 태어난다. 예쁜 여자아이다. 부모들은 삼칠일이 지날 때까지 숨죽여 아이를 보살핀다. 완전 성숙의 의미인 백. 아이가 백일을 무사히 넘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상을 차린다. 상 위에는 신성의 상징적 의미로 백설기와 액을 면하게 하는 찰수수경단, 만물의 조화로써 오색송편이 올라 있다. 아이는 돌을 지나 쑥쑥 자란다. 흰 떡국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을 먹고, 때로 어려운 책을 뗄 때면 책례로 오색송편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여자아이는 어느새 혼례를 앞두고 있다. 함을 받기 위해 봉채떡을 만들고, 함이 도착하자 시루에 절을 하고 함을 연다. 혼례식 상에 오른 달떡이 부부의 앞길을 보름달처럼 환히 비춘다. 정신없는 혼례가 끝나고 색을 곱게 들인 절편과 두텁떡으로 이바지 음식을 보낸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 혼인을 하는 세월 동안 떡은 여전히 축복과 기념을 보탠다. 환갑을 맞고 세월이 더 지나 여자가 이승을 떠난 후에도 여자의 자식들은 여자를 그리며 떡을 올릴 것이다. 떡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맞는 고비마다에 있다. 고비고비에.


 


 


떡은 자연이다. 떡 속에는 달이 뜨고 느티나무가 자라고 국화꽃이 피고 눈이 내린다. 새싹이 움트면 새싹으로, 꽃이 피면 꽃으로, 감자가 익으면 감자로, 쌀이 없으면 보리로 떡을 빚는다. 화전을 놀며 움츠렸던 몸을 펴고, 떡을 찌며 풍년을 점치고, 가을비 오면 떡을 빚는다. 섬중사람은 조떡, 해변사람은 파래떡, 산중사람은 번추떡, 들녘사람은 쑥떡을 찐다. 떡은 자연을 품고 자연은 떡을 물들인다. 떡을 빚는 것은 자연을 빚는 것이다. 꽃을 지지는 이는 꽃을 닮아가고 달떡을 빚는 이의 입가엔 달빛 미소가 은은하게 번진다.
자연은 별도의 감미료를 넣지 않아도 항시 떡의 제 맛을 유지시킨다. 연한 모시잎을 넣어 빚은 송편은 방부제가 필요 없다. 기장찰과 차수수가루를 엿기름가루에 삭혀 만든 노티떡은 좀처럼 상하지 않는다. 송편 아래 솔잎에, 복중 벙거지떡 막걸리에, 쑥개떡 쑥에, 치유의 힘은 어디에든 들어 있다.
떡은 액막이다. 사월에 드는 액은 단옷날 수리떡으로 막아내고, 칠월에 드는 액은 한가위 오리송편 빚어 막고, 동짓달에 드는 액은 섣달 인절미 빚어 막는다고 했다.

떡을 친다. 내가 치고 네가 받는 동안 떡은 음악이 된다. 찰떡궁 찰떡궁. 함지박 이고 떡장사를 나가도 찰떡궁 찰떡궁 노래는 여전히 입가에 맴돈다. 떡 사시오 찰떡궁, 찰진 찰떡이오 찰떡궁. 떡을 노래한다. 떡을 노래하는 것은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자연처럼 계절마다 달마다 옷을 갈아입는 떡을 노래한다. 떡을 치고 떡을 노래하는 동안에는 고난한 삶도 억울함도 막막함도 사라진다.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정월 보름 달떡이요/ 이월 한식 송병이요/ 삼월 삼짇 쑥떡이로다/ 사월 파일 느티떡에 / 오월 단오 수리취떡/ 유월 유두에 밀전병이라/ 칠월 칠석에 수단이요/ 팔월 가위 모례 송편/ 구월 구일 국화떡이라/ 시월 상달 무시루떡/ 동짓달 동짓날에 새앙심이/ 섣달에는 골무떡이라/ 두 귀 발쪽 송편이요/ 세 귀 발쪽 호만두/ 네 귀 발쪽 인절미로다/ 먹기 좋은 꿀설기/ 보기 좋은 백설기/ 시금 털털 증편이로다/ 키 크고 싱거운 흰떡이요/ 의가 좋은 개피떡(서울 지역에 전하고 있는 민요 「떡타령」 중에서)






떡은 넉넉하다. 떡시루는 크고 듬직하다. 혼자 먹으려고 찌는 떡은 없다. 혼자서 떡을 칠 수도 없다. 두 사람이 박자를 맞춰 떡메를 쳐야 힘이 덜 든다. 장정들이 떡메를 내리치면 아낙들은 떡밥을 뒤집는다.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어 먹는다. 음식을 배불리 대접한 잔칫집이라도 손님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은혜 입은 까마귀를 위해 약밥을 짓고, 굿판을 끝낸 무당도 제면할머니떡을 나누어준다. 시집간 여동생을 찾은 오라버니에게 맛깔진 찰떡을 못 주면 개떡이라도 주고 싶은 게 동생 마음이다. 이사를 해도 개업을 해도 새 기계를 들여놓아도 떡을 돌린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무뚝뚝한 이웃 남자도 떡 한 접시에 경계를 푼다. 떡은 나누어야 제 맛이다. 맛을 나누고 멋을 나눈다.




떡은 추억이다. 떡을 통해 추억을 보고 추억을 굽고 추억을 듣는다. 막 뚜껑을 연 떡시루의 솟아오른 김처럼 아련하고 향긋하게 퍼지는, 떡은 말랑말랑한 추억이다. 연탄불 위에 가래떡 굽는 겨울밤 동치미 한 그릇 퍼오는 동안 고소한 떡 사라질까 걸음을 빨리하고, 교실 난로 연통에 가래떡을 쓱 밀어 대패밥처럼 얇게 만들어 먹던 옛 동무들, 골목골목 떡장수의 외침이 울려 퍼지면 괜히 아픈 척 떼를 쓰기도 했던 오래전 추억. 지금도 쓸쓸한 겨울밤이면 굳은 인절미 프라이팬에 지져 엄마에게 가져가고 싶어지는데, 달콤한 꿀이나 조청 한 종지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풍성해지는, 굳은 떡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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