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내게 모카 커피 아이스 블렌디드와 차 중 무엇을 택하겠냐고 묻는 것은, 빨간 고춧국물이 자박자박한 갈치조림과 말간 재첩국 중 무얼 먹겠냐고 묻는 것과 똑같았다. 에스프레소 커피의 농염한 맛에 비해 차의 맛은 너무 순진하게만 느껴졌고, 테이크아웃 커피점의 주문대 앞에서 이기는 쪽은 늘 커피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티백을 제외한 진짜 차는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즐기기엔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음료가 아닌가? 팔팔 끓인 물을 약간 식히고 다기를 따뜻하게 데우고 여러 단계를 거쳐 따르고… 맛을 음미하는 데 적당한 장소와 시간이 필요한 차는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음료라며 부정적인 뉘앙스로 결론지은 적도 있다. 또 따져보면 그 종류는 어찌나 많은지! 똑같이 생긴 찻잎이 각각 산지와 생산 시기에 따라 손에 꼽을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종류를 양산하고 있지 않은가? 제대로 즐기려면 동아전과 한 권 분량을 공부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은 차에 대한 무지를 한동안 외면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차에 대해 본격적으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 난 ‘적차 논쟁’을 읽고부터. 알고 보니 올 3월부터 차 전문가로 이름난 지허 스님과 여연 스님 사이에서 ‘전통차’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있었다. 논쟁의 발단은 지허 스님이 선암사 일주문 밖에 있는 자생차 밭에서 직접 일구고 덖어낸 차를 두고 ‘진짜 우리차’라고 주장한 데 있었다. 거기서 그쳤으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도 있었을 법한데, ‘기존의 녹차는 모두 일본에서 들어온 왜색차’라고 일갈한 대목에서부터 문제가 불거진 듯. 녹차를 주로 만들어온 여연 스님은 “지허 스님이 만든 차는 녹차에서 변형된 것이지 결코 차의 주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차는 차나무, 만드는 법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었다. 존경받는 스님들이 이토록 앙칼지게 수선을 피워야 할 정도로 차가 대단한 것인가 싶어 놀랍기도 했지만, 나는 곧 논쟁 자체보다 설왕설래를 통해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들에 주목했다. 지허 스님이 ‘진짜 우리 차’라고 주장한 ‘금화산이’는 80g에 무려 15만원이나 한다. 숭늉처럼 구수한 맛이 나는 이 차를 얻기 위해선 회원 가입을 해야 하는데, 현재 1백여 명 정도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임권택 감독, 작가 한승원, 홍익대 미대 안상수 교수 등이 그 주요 멤버들. 이 마지막 대목에선 문득 가회동 작은 빌딩의 주인이자 사진가인 김영일 씨가 예전에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그는 건물을 찾은 손님에게 전통 다기를 이용해서 직접 차를 끓이고 따라서 대접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다.
“지인들끼리 돈을 모아 차 밭을 사거나 차 농장에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요. 좋은 토질과 기후에서 자란 제대로 된 차를 즐겨보자는 거죠. 산지에서 직송으로 집까지 배달되는데, 일년에 서너 번 정도 받아 먹을 수가 있어요. 초봄 햇차는 연한 우유맛이 나고, 11월에 차 꽃이 질 때 올라온 차는 진한 난향이 나죠.” 물론 이런 ‘맞춤’ 차의 가격이 저렴할 리는 만무하다. 당시 그가 보여준 가장 저렴한 품종이 6만원 정도였으니 상등급 차에는 아마 ‘금화산이’ 못지않은 가격이 붙어 있을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끼리 지방에다 다원을 마련하고 차를 가져다 마시는 일. ‘살롱주의’의 혐의가 짙은 이 행위들이 딱히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두 가지 사실만은 인정해야 했다.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이 세상의 한쪽에서 간 크게도 천천히 차 맛을 음미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차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의식하고 있건 아니건 간에 ‘구별짓기’를 행하고 있다는 것.
분위기에 취하다 “결국 깊고 그윽한 차의 맛 때문인가요?” 나는 일본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한 세트 스타일리스트 김성민 씨를 통해 일본의 한 다도가에서 성장한 여인과 이메일로 인터뷰를 했다. 사람들이 차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그녀라면 정확히 터득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보내온 장문의 답장 요지는 이랬다. “일본인들은 차에 밥을 말아 먹을 정도로 차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맛이라는 건 언제나 두 번째 이유일 뿐입니다. 차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첫 번째 이유는 ‘정서’입니다. 정중동을 느끼게 하는 그 여유 말입니다.”
마치 우문현답을 들은 듯한 느낌이었다. 조용한 분위기, 부드러운 동작, 물을 따르는 소리… . 차보다도 차를 즐기는 그 분위기를 사랑한다는 대답은 압구정동에 위치한 앤티크 홍차 카페 ‘런던 아이’의 정영숙 사장의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10년 동안 런던에 살면서 느꼈던 서양의 차 문화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같은 차 이파리로 녹차와 홍차를 만들 듯, 동서양 티 테이블의 풍경은 달라도 차를 즐기는 그 마음은 똑같습니다. 깨끗한 찻물을 도자기로 만든 찻주전자에서 끓여낸 후 적당한 온도로 식기를 기다리는 순간. 예쁜 다기 세트를 테이블에 세팅한 후 둘러앉아서 호스티스가 차를 따라주길 기다리는 순간. 차보다는 차를 마시기까지의 그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기왕 이야기가 ‘분위기’로 흘렀으니 말인데, 이 경지에서 더 나아간 사람을 꼽으라면 조선의 유명 산수화가인 추사 김정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서른 살에 다산 정약용의 아들 유산의 소개로 동갑내기인 초의로부터 해마다 차를 얻어 마시기 시작한 그는 제주도에 유배 가서도 차나무를 재배할 정도로 차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시구를 보면 차의 맛이나 분위기를 넘어서 차의 존재 자체를 각별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고요히 앉았노라니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구나/ 신비한 그 어느 때에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네.”
동서양 문인들의 예민한 정서를 자극했던 차의 매력은 커피와는 다른 ‘일상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슈퍼에서 파는 녹차 티백과 1년에 단 이틀만 수확한다는 중국의 백차가 같은 계급에서 소비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차는 자고로 평등한 음료로 통했다. 특히 동양과 아랍권에서는 차 마시는 일이 일상적인 생활이다. 허름한 중국 식당이나 조그마한 이집트 카페는 물론 기차역, 열차 안, 심지어 야영지 안에서도 차를 마시는 풍경은 익숙하다. 인도에서는 아직까지도 행상이 직접 차를 나르며 팔고, 중앙 아시아의 외딴 지역에서는 야크의 젖으로 만든 버터를 차에 넣은 ‘버터티’를 마신다. 이 차들은 테이크 커피점에서처럼 주문을 해야 하거나 다양한 플래버를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싱가포르의 재스민차나 중국의 우롱차, 말레이시아의 보차처럼 언제나 다같이 나눠 마실 수 있는 물 같은 것.
재미있는 점은 차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수록 필연적으로 그 평등함에 균열이 온다는 것이다. 모든 기호품이 그렇듯이 차 역시 원래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고, 중국으로부터 뒤늦게 차를 받아들인 유럽의 여러 나라에는 여전히 그 여운이 강하게 남아 있다. 차를 본격적으로 즐기려고 마음먹고 보면 준수해야 할 형식들이 고급 레스토랑의 읽기 어려운 메뉴판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차를 마시면서 눈요기와 식욕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한 것은 프랑스의 귀족들. 지금도 유럽의 많은 정통 티살롱에선 화려한 프린트와 금은 세공이 더해진 귀한 다기들이 선호되고 있다. 더불어 차를 주재료로 한 요리와 고급 다과류를 만들어내면서 차와 관련한 식도락의 장이 펼쳐졌다. 육류 요리에는 레드 와인을, 해산물 요리에는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는 것처럼 프랑스의 차 애호가들은 음식에 따라 다양한 차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닭고기에는 중국의 라푸싼샤오종차를, 향료가 가미된 음식에는 로터스 녹차를 마시는 등. 또 하루 중 마시는 차의 종류에도 구분을 지어놓았는데, 오후에는 다즐링차나 녹차 같은 가벼운 차를 마시고 오전에는 과일차류의 가향차를 마시는 것이 서양인들의 기본적인 룰이다. 묘미에 반하다 인제대 이광주 교수가 쓴 �동서양의 차 이야기�에는 ‘차’나 ‘티’라는 이름은 둘 다 중국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적혀 있다. ‘차’는 광둥어 계열인 반면, ‘티’는 유럽이 17세기 이후 ‘Tai’라는 푸젠어 계열을 받아들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원이 한 뿌리이듯 모든 차는 같은 차나무의 잎으로 만들어진다. 사전적으로 정의하자면, 차는 산다학과에 속하는 상록 관엽수인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서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차나무 뿌리는 몸보다 3배나 길다고 하는데, 놀라운 점은 이렇게 터를 단단히 잡고도 1년을 더 준비하고 나서야 엄지손가락만한 찻잎을 만들어 내민다는 것! 이 귀한 찻잎들을 완전히 발효시켜 만든 게 홍차, 발효시키지 않은 게 녹차, 극히 짧은 시간 발효시킨 게 반발효차로 차의 종류는 크게 이 세 가지로 나뉜다. 상층부에 달린 가장 작은 잎부터 하단부의 넓은 잎까지 어떤 잎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어느 시기에 수확한 차의 잎을 쓰느냐에 따라서 차의 등급이 결정되고 차의 산지에 의해서도 다양한 차들이 탄생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인도의 다즐링과 아쌈, 영국이 차를 재배하기 위해 사들였던 실론 섬의 실론 등이 있다.
“하지만 차의 진정한 묘미는 블렌딩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차를 많이 마신다는 영국인들을 예로 들어보죠.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티는 아침에 우유를 넣어서 마시는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예요. 적갈색에 스위트한 향이 최고인데, 그 티백 안에는 아쌈, 실론, 다즐링 등에서 재배된 찻잎이 블렌딩되어 있습니다.”
이는 롯데백화점에 매장을 연 영국 헤로즈 티 살롱 관계자의 말. 영국 왕실에 납품되는 것으로 유명한 헤로즈의 블렌드 티는 아쌈과 실론, 다즐링, 닐기리, 케냐 등 믹스된 각각의 홍차 맛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윽한 풍미를 유지하는 내공을 자랑한다. 하이 티 스페셜, 모닝 딜라이트, 선라이즈 브렉퍼스트, 블렌드 넘버14 등 헤로즈에서도 손꼽히는 블렌드 티들을 맛보면 부드러운 향기와 떫은맛, 적당한 감칠맛 등 오미를 자극하는 맛을 확인할 수 있다. 청담동의 살롱 드 떼의 조명숙 과장은 이 완벽한 맛의 조합을 위해서는 ‘시음 전문가’들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못박는다(‘시음 전문가’란 차를 블렌딩하는 공인자격사를 일컫는다). “티 살롱에서 선보이는 고유한 블렌드 티는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시음 전문가들이 따르는 원칙은 한 가집니다. 홍차, 녹차, 과일차, 허브티가 서로의 맛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화롭게 블렌딩되어야 한다는 것.”
교양을 완성하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는 차에 곁들일 거대한 설탕 덩어리들을 조각내고 있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맛있는 차 한 잔>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설탕이 차의 맛을 떨어뜨리며 나이가 들수록 더 진한 차를 좋아하게 됐다는 고백을 한다. 어떤 게 맞는 걸까? 많은 나라에서 차 특유의 떫은맛을 제거하기 위해 밀크나 레몬, 설탕 등을 넣고 있다. 그러나 차 애호가들은 퀄리티가 아주 떨어지지 않는 이상, 스트레이트로 마실 것을 권한다. 세계 각지에서 직수입한 수십여 가지의 질 좋은 차를 마실 수 있는 티 살롱 ‘마티네’의 관계자는 진정한 차의 색과 맛, 향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녹차는 예부터 은은한 비취색에 옅은 우유나 치즈맛이 나는 것을 최고로 쳤습니다. 향은 풋풋하고 순하며, 청량한 것을 선호했습니다.” 반면 홍차는 한 가지 색을 최고로 치지 않는다. 호박색, 금색, 회록색 등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모두 인정하는데 그 대신 맛과 찻물에서 최고를 가린다. 최상등급의 홍차는 떫은맛, 쓴맛, 감칠맛, 단맛이 나면서 오미를 자극하고 찻물이 투명하며 빛이 나야 한다.
차는 오감으로 마신다고 한다. 귀로는 찻물 끓는 소리를, 코로는 향기를, 눈으로는 다구와 차를, 입으로는 차의 맛을, 손으로는 찻잔의 감촉을 즐기기 때문이다. ‘런던 아이’의 정 사장은 차를 마시는 행위는 교양 그 자체라고 강조하면서 차 마시는 법을 드라마틱하게 직접 시연해 보였다.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서 한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린 후, 다른 한 손으로 살짝 잔을 받쳐야 합니다. 입술에 천천히 잔을 가져다 댄 후 한 모금 정도 마시는데, 이때 후루룩 소리가 나서는 절대 안 되고, 차를 바로 목구멍으로 넘겨서도 안 됩니다. 앞니 세 개로 차를 잘근잘근 씹어서 혀로 넘어가게 한 후 삼켜야 하죠. 이 때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미소를 짓는다면 더욱 좋겠죠. 앞에 사람이 있다면 45도 각도로 살짝 고개를 돌려서 마시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의 행동도 중요하다. 빈 찻잔에 남은 향기를 맡거나 입 안에 남은 잔향을 음미하며 잠시 기다렸다가 아주 살짝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놓아야 한다. 탁주 사발 내려놓듯 테이블에 탁 하니 내려놓아서는 절대 ‘교양’을 완성하지 못한다.
자연의 정신을 품은 차 요조숙녀와 귀부인들끼리 둘러앉아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교양의 완성판을 연출하건, 해질 무렵 사막의 한가운데서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며 숭늉 들이키듯 마시건 간에 차가 인간에게 선사한 효용은 같다. 차를 매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자연의 음료를 몸으로 흘려보내면서 건강한 삶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얼루어>의 런던 통신원 박정언 씨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에서는 하루에 여러 차례의 티타임을 갖습니다. 아침에 한번, 점심 전에 한번, 점심 후에 한번. 퇴근 전 한번. 퇴근 후 저녁에 한번. TV를 보는 대신 쉴새없이 차를 마시면서 영국인들은 대화를 나누고 삶의 활력을 찾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차의 세계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방대하게 느껴진다. 생활 속의 차가 인간에게 미친 영향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유럽의 <라이프>지는 새 천년을 앞두고 지난 천년의 세계사적 대사건 1백 가지를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차의 유럽 전래가 초래한 삶의 패턴의 변화를 28위로 올려놓았다. 영국의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영국군에게는 군수품이 아니라 차가 필요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위의 인간들은 어디에선가 차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영국인은 연간 1천5백 잔, 미국인은 2백 잔, 러시아인은 5백 잔, 독일인은 1백60잔, 프랑스인이 1백 잔을 마시고, 일본은 세계 7위의 차 생산국이자 소비국이다. 차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은 아예 어떤 수치 계산도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차 밭에 서서 차를 따거나 기계로 밀거나 커다란 무쇠솥에 차를 덖고 있을 것이다. 차가 위대한 것은 지허 스님의 표현대로, 그것이 자연의 정신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햇살 아래서 대지의 기를 흡수한 차는 솥 안에서 ‘댓잎에 첫눈 내리는 소리’를 내고 ‘한겨울 봄날 같은 햇볕이 숲에 비칠 때 피어오르는 옅은 안개’ 같은 김이 올라야 비로소 완성된다.
차를 맹숭맹숭한 본처처럼, 커피를 달콤한 애첩처럼 여기던 나의 입맛은 차를 둘러싼 다양한 박물지들을 접하면서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앞에는 중국 푸지 지방의 고산지대에서 날아온 녹찻잎이 경건히 놓여 있다. 희고 미세한 털이 보송보송하게 달려 있는 게 보기만 해도 신선하고 아릿한 향이 전해오는 느낌이다. 책상 서랍을 뒤져 먼지가 풀풀 날리는 도자기 컵을 꺼내 물로 깨끗이 닦고는 거름망에 이 찻잎들을 조심스레 넣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뜨거운 물을 붓는다. 찻물이 우러나오길 기다리면서 나는 조용한 기쁨에 젖는다. 차를 온전히 이해하는 이라면 내가 왜 이런 감상적인 글귀를 적고 있는지 알 것이다. 차, 티, 테. 전세계인에게 지금 이 순간 다양한 발음으로 불리고 있을 이 음료는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소박하고 근사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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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뉴욕 맨해튼
그 당시 나는 뉴욕의 한 패션 출판사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었다. 사무실이 있던 소호 거리는 샤넬, D&G 같은 패션 스토어들이 무색하리만치 화려한 단풍들이 막 물을 올리고 있었다. 늦은 오후, 내 앞으로 배달돼온 작은 상자 하나. 샘플이겠거니 하고 뜯어본 상자에서 이국적인 풍모의 엽서 한 장이 떨어졌다. 엽서에는 “타이완과 일본으로 떠나면서, 11월 20일까지는 돌아올 것임, 잘 지내세요”라는 짤막한 사연과 함께 동봉한 차를 만드는 방법이 상세히 적혀 있다. 차 옆에는 이국적인 모습의 다기 세트가 낯설게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물을 보낸 사람은 몇 주전 이스트 빌리지의 재즈 바에서 만난 27세의 사업가 조슈아. 처음 그가 자신을 ‘Tea Man’이라고 소개할 때, 나는 시골 다방의 배 나온 아저씨, 김지미의 영화 <티켓> 등을 떠올렸다. 그러나 중국 역대 왕조들의 내력과 문화혁명을 논하고 일본의 차문화가 한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등의 얘기를 쏟아내면서 내 관심을 끌었다. 마른 몸매에, 질끈 묶은 머리, 선이 날카로운 얼굴이 당혹스런 다방 아저씨의 모습은 아니다.
서로 사귀는 사람들이 있는 처지라 비즈니스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대화를 끝내기가 싫었던 기억. 결국 시끄러운 재즈바를 떠나 동네의 작은 다이너로 옮겨 차와 여행, 아버지와 역사 등 닥치는 대로 얘기를 나누며 새벽을 맞았다. 그리고 며칠이 흐른 후 이 선물 상자가 당도한 것이다. 한국 차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내 명함을 자연스레 건네줄 수 있던 터였다.
상자 안에는 소꿉놀이에나 쓰일 법한 귀여운 찻주전자와 찻잔, 우린 차를 받아서 나눠 따르는 데 쓰이는 입이 뾰족한 컵, 그리고 차를 뜨는 데 쓰는 대나무 주걱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다기 세트는 중국 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싱(Yixing) 지방의 자사호였다. 그리고 두 통의 차통에는 각기 재스민 펄(Jasmine Pearl)이라는 향기로운 녹차와 실버 니들(Silver Needle)이라는 바늘 모양에 흰털이 송송하게 난 건강한 백차잎들이 들어 있었다. 재스민 펄의 차 뚜껑을 열자 그 향에 온 사무실의 관심이 쏠렸다. 그로부터 7개월 후, 다방 주인을 사귀는 줄 알고 밤잠 설치시던 서울의 부모님을 뵈러 우리 둘은 한 비행기에 올랐고, 그는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 첫 재스민 향의 기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그의 신부가 됐다.
조슈아는 청혼하면서 자기와 평생 여행할 준비가 됐냐고 물었다. 나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거닐거나, 로마의 작은 카페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부부를 연상하며 신데렐라가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부끄러워했다. 문 없는 화장실에서 낯선 중국 여인과 눈인사를 하며 볼일을 보고, 해발 1000여미터가 넘는 산길을 넘고(거의 정상까지 지프를 타고 서너 시간 올라간 후), 고무 호스 같은 뱀 고기를 뭔지 모르고 먹었다가 무지하게 열받고, 주전자에 데운 물로 샤워하는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은 스스로 자신을 노매드(Nomad)라고 부른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족을 따라 여행을 많이 했고, 철들고 나서는 혼자 떠나기를 밥 먹듯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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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재스민 펄과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백차
2002년 봄, 결혼 후 조슈아가 맨 처음 보여주고 싶어 한 차 순례지는 다름아닌 그의 첫 선물이던 재스민 펄과 실버 니들 백차가 자라고 제조되는 후지엔(Fujian: 복건성) 지방이었다. 후지엔은 중국의 남동부에 위치한 아열대 기후 지방이다. 우리는 실버 니들, 화이트 페이요니(White Peony) 같은 오리지널 백차가 나는 후딩(Fuding)과 장흐(Zhenghe) 지역을 돌며 외부 공개가 제한된 백차 제조 과정을 견학하는 특혜를 누렸다. 백차는 예부터 희귀한 데다 우아한 향과 맛으로 중국의 차문화에서 보물로 여겨져 왔다. 송나라 시절엔 백차가 왕실 진상품으로 선정되면서 오늘날까지 ‘황제의 차’라는 명예로운 닉네임을 가지게 된다. 진품 백차의 재배와 제조는 이 지방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북부의 소규모 단지에서만 경작이 가능하다. 평균 강우량 1600ml의 아열대 기후와 토양이 백차를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예부터 재배돼오던 고유의 진품 백차종이 이곳에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해발 850~1000미터에 이르는 후딩, 장흐, 지안양(Jianyang) 등이 바로 이 유서 깊은 지역들로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곳의 고산 지대에서 백차가 재배된다.
몇 해 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백차의 멋과 건강에 미치는 혜택을 다룬 적이 있다. 이 쇼에서는 녹차보다 항암 물질이 더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한 실정이다. 그 후 미국 전역에서는 백차 열풍이 불기 시작해 물량이 달릴 지경이 되었다. 이 때문에 너도나도 백차 품종을 얻어가 다른 차종을 재배하던 경작지들에서도 백차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장에 가보면 너무나도 많은 ‘화이트 티’들이 진열되어 있다. 백차라는 이름은 찻잎이 은빛 나는 흰색을 띠었다고 붙여진 것으로 순수 백차종으로는 다바이(큰 백차종), 다하오(큰 터럭종), 시하오 바이 차이 차(작은 백채소종), 그리고 슈이 시안(물의 요정종) 등이 있다. 후딩과 장흐 지방은 오리지널 백차 품종을 가지고 수세대를 걸쳐 백차를 재배해왔다. 캘리포니아에서 재배한 포도로 거품 나는 저가 백포도주를 만들고 샴페인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던 상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와인 애호가들은 프랑스 샴페인 지방에서 나는 포도와 그곳의 오래된 스파클링 와인 제조 노하우로 완성된 것만을 진정한 샴페인으로 친다. 파르마산 치즈도 이탈리아 파르마 지역에서 수대에 걸쳐 쌓아온 기술로 만들어진 특별한 성과물이다. 거품 난다고 다 샴페인이 아니고, 피자 위에 갈아 놓기만 하면 다 파르마산 치즈가 되는 것이 아니듯 찻잎 색깔이 은백색이라고 모두 백차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백차는 인도에서도, 스리랑카에서도 재배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중국 후지엔 지방 북쪽이 아니라면 진정한 백차 품종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한다, 후지엔은 백차 외에도 재스민 펄을 만드는 데 쓰이는 녹차와 재스민 꽃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2002년 봄의 여행에서는 녹차를 진주 모양으로 돌돌 마는 과정까지만 볼 수 있었다. 초여름이 되어 재스민꽃이 수확되고 난 후 진주 모양의 녹차를 재스민꽃과 여러 차례 배합해 천연 향을 얻는 센팅 과정을 거쳐야 재스민 펄이 탄생된다. 내 결혼 스토리를 아는 많은 친구들이 이 재스민 펄의 팬이 됐다. 차를 만드는 순간부터 차를 마시고 난 후 오랫동안 은은하게 남는 꽃향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제격이었다. 결혼을 앞둔 친구들에게 난 재스민 펄을 선물로 보내곤 한다. 나 자신의 러브 스토리를 되새기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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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전설, 운남성으로의 순례를 떠나다
운남은 차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고대 이래의 차 교역지이며 보이차 생산지다. “운남에 가려면 일년 동안 열심히 운동해야 해. 등산 훈련도 하고. 하이힐은 절대 안 돼.” 조슈아는 내가 운남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벌레와 동물, 특히 개를 무서워하고, 햇빛 알레르기가 심한 데다 화장실을 심히 가려 쓰는 아내를 데려가 봤자 고생문이 훤할 거라고, 시댁 식구들까지 합세해 말렸다. 그러나 차를 알면 알수록 운남을 보지 않았다는 게 예루살렘 순례를 못한 유대인처럼 마음 한 곳이 묵직했다.<다경>, <동다송>, <다신전>을 읽고, 자사호의 본고장 이싱을 다녀온 후에는 이런 마음이 더했다. 천 년이 넘은 야생 차나무들을 내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싶었다. 여행 얘기 듣기 좋아하는 장인이 운남 여행기를 딸에게서 전혀 들은 적이 없다며 아쉬워하시자 결국 남편의 마음이 움직였다.
중국의 파트너 W와, 남편의 친구 E가 동행하고, 운남 현지에서 차 연구원 C와 만나는 것으로 계획이 짜졌다. 우선 상하이에서 출발, 쿤밍(Kunnming)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징홍(Jinghong)까지 간 다음, 야생 차밭이 있는 고산 부락까지 차로 다시 서너 시간을 가야 한다.운남에는 샹그릴라, 리장 등 관광 명소가 많은데, 모두 쿤밍을 거쳐야 한다. 쿤밍은 사시사철 봄과 같은 날씨를 자랑하고, 교통의 요지인 덕분에 예부터 교역, 문물이 발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통량이 너무 많아 공해가 심한 데다 다른 도시들보다 사람들이 좀 드세 보였다.
운남은 중국의 남서부에 위치한 산이 많은 지역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문화와 차나무를 보유한 본고장이다. 아시아의 4대 강으로 꼽히는 양쯔(Yangtze), 메콩(Mekong), 샐윈(Salween), 이라와디(Irradwaddy)가 모두 지나가고,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생태학적 다양성이 많은 지역으로 증명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불랑(Bulang), 다이(Dai), 라후(Lahu)를 비롯한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산 속에 외딴 부락을 형성해 살고 있다. 불랑족과 다이족은 찻잎을 요리해 먹는 풍습이 있다던데, 과연 우리가 방문한 차 제조 공장과 숙박을 맡아준 불랑족 마을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할 때마다 야생 찻잎튀김과 찻잎무침이 나왔다. 쌉싸래하면서도 신선한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최근 들어 대량 차 생산을 위해 자연을 훼손한 안타까운 사례들도 곳곳에 보이지만, 남편의 프로젝트가 있는 징마이, 망징 지역은 아직 야생으로 자라는 차밭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이 많았다. 생태계가 거의 파손되지 않은 까닭에 차 나무와 다른 수목들과 함께 서식하는 온갖 버섯, 약초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중 ‘가수를 위한 약초(Singer’s Herb)’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약초가 차나무에 붙어 자라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따가운 목과 감기를 치료하는 데 이 약초를 먹는다고 한다.
무려 2700년 수령의 차수왕(King Tea Tree)이 자리 잡고 있는 키안지아자이(Qian Jia Zhai)라는 산골이 있다. 남편이 1년 전에 방문하고 내가 동행하는 이번 여행에선 탈락시킨 험준한 곳이다. ‘키안지아자이’란 1천 가구가 사는 산촌 또는 1천 군대가 사는 산촌이라는 뜻으로 1천여 명의 산촌 부족 또는 군인들이 외딴 산에 정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명 왕조(1368~1644) 말엽, 황실 군대와 운남의 산촌 부족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다. 이때 1천여 명의 산촌 부족 출신 군인들이 황실 군대를 피해 키안지아자이 산 외딴 곳에 자기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중국과 일본의 식물학자들은 이곳의 차수왕 나무가 대략 2700년 묵었으며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차나무라고 발표했다. 키안지아자이에 처음 차나무를 심은 농부들은 푸족(Pu Tribe, 1066~221 BC)으로 알려져 있다. 차 연구가들은 최초로 야생 차나무를 농사 개념으로 도입한 차 농부로 이 푸족을 든다. 여기에서 보이차, 중국 발음으로 푸에어차(Pu-erh Tea)의 어원이 나온 것이다.
보이차는 녹차, 우롱차(청차), 백차, 홍차(블랙티)와는 구별되는 유일한 발효차다. 올바른 보관법을 따른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 유일한 차종이기도 하다. 보이차는 운남에서 자라는 대엽종 교목성 차나무(broad leaf arbor tea tree varietals)에서 채취, 제조된 것만이 진정한 보이차로 간주된다. 전통 중국의학에 따르면 보이차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소화를 돕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혈중 알코올 농도를 낮춰주고, 하루 5~8잔 음용하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도 전해진다. 실제로 많은 중국인들이 해독, 해장차로 보이차를 애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에서 보이차의 가격은 상당 부분 불합리하게 책정된다. 제대로 숙성되지 못했거나 위생 문제가 증명되지 않은 위험한 보이차가 몇십 년 발효된 명품 보이차로 둔갑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높은 가격에 암암리에 판매되는 것을 목격했다. 조슈아도 처음 보이차를 공부할 당시, 오래되면 좋은 줄 알고 1950년산 빈티지 보이차를 여러 덩이 샀다가 실망한 적이 있다.
금값을 호가하는 빈티지 보이차의 유행은 1980년대 초반 광둥과 홍콩에서 시작됐다. 기름진 광둥요리와 궁합이 잘 맞는 보이차의 수요가 증가하자 레스토랑과 티하우스들은 보이차를 원활하게 공급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높아지는 생보이차는 가격도 높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들은 대신 숙보이차를 선택했다. 숙보이차는 실내에서 인공적으로 습기와 온도를 더해 산화를 촉진시키는 속성 숙성법으로 대량 생산해낸 보이차다. 차 전문가들이 말하기로는 숙보이차는 출시하는 즉시 마셔도 좋으며 5년 이상이 지나면 오히려 그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숙보이를 생보이로 속아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많다는 것. 또한 위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습한 창고에서 속성으로 발효시켰다면 건강을 해칠 위험까지 있다. 빈티지 중에 특히 1970~90년대에 출하된 보이차는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중국 농업이 산업화되면서 화학비료의 사용이 남발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출하된 보이차는 생보이라 해도 안전성을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남편은 신비의 빈티지 보이차 대신 유기농과 페어 트레이드로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보이차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출시된 유기농 보이차로 지금부터 스스로 빈티지를 만들어보는 것도 보이차를 즐기는 한 방법이라고 본다.보이차와 이 차의 본고장인 자연 그대로의 땅, 운남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페어 트레이드를 설명하면서 더 하기로 하겠다.
중국을 누비는 여행의 기술
조슈아는 우리의 여행 스타일을 ‘Five Stars to No Star’라고 부른다. 5성급 초호화 호텔에서부터 별이 아예 없는 서글픈 오두막 수준에 이르기까지 수준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차 원산지로 들어가기 전 항상 상하이에 며칠 머물게 되는데, 이때 묵는 호텔은 주로 내가 정한다. 처음 몇 해 동안은 국빈들을 영접하는 호텔로 유명한 화평(和平, 영어 이름은 Peace) 호텔을 애용했다. 1929년에 처음 문을 연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듯, 우아한 앤티크 가구들로 꾸며진 넓고 클래식한 실내는 마치 옛날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상하이 최대의 번화가인 난징동로에 위치한 호텔 밖을 나서면 바로 재래식, 현대식 쇼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몇몇 비즈니스 호텔들을 탐험하기도 했는데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난징서로에 위치한 리츠칼튼 호텔이다. 주위에 뉴욕 5번가를 연상시키는 황금 쇼핑가가 꾸며져 있고, 서구식 입맛에 맞춘 식당과 커피숍들이 즐비하다. 아마 외국 금융계 비즈니스맨들이 많이 투숙하기 때문이 아닐지. 한국 스낵, 컵라면 등을 비롯해 웬만한 수입 기호 식품들은 다 갖춰진 대형 슈퍼마켓도 이 호텔에서 도보로 1분 거리 안에 있다.
최근 우리가 사랑에 빠진 호텔은 이름도 촌스러운 ‘88 신천지(88 xintiandi)’ 호텔이다. 올드 상하이를 디즈니식 관광명소로 재현해냈다는 신천지의 남쪽, 환피난로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전통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가장 잘 해석해낸 전혀 디즈니랜드 같지 않은 곳. 스타일과 서비스 면에서 지금껏 실망을 준 적이 없는 우아한 부티크 호텔이다. 명대 스타일의 가구와 스파 수준의 욕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는 조슈아와 나를 동시에 만족시켰다. 따로 침실이 구별되어 있는 스위트 스타일도 좋지만 사방이 커튼으로 둘러싸인 아일랜드식 마루에 포스트형 침대가 올려져 있는 객실을 추천하고 싶다. 최고급 주방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것도 특징.
호텔 주변은 테마식 구역으로 개발돼 동네 자체가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아담한 보석, 공예, 그릇, 선물 가게들이 즐비하고, 스타일리시한 카페, 현대식 티하우스들도 즐길 만하다. 한나절 걸어 다니기에 딱 알맞을 정도의 거리에 식도락, 쇼핑, 문화 체험 등 모든 것이 모여 있는 낭만적인 곳이 바로 상하이의 신천지다.
남편과 내가 상하이에 들를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한 곳 있다. 고풍스런 유럽풍의 프랑스 특구 내에 위치한 페이스 상하이.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열강들은 앞다투어 상하이를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는 상하이 안에서 자치권과 치외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구를 하나씩 보유하게 되는데, 이 중 프랑스 특구가 가장 매력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페이스 상하이는 1920년대에 세워진 네 동의 유럽식 건물과 작은 호수, 세 개의 정원으로 이뤄져 있는 뤼진 게스트하우스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2층으로 된 고옥에 독특한 분위기의 바 ‘페이스 바’와 태국 레스토랑 ‘라나 타이,’ 인도 레스토랑 ‘하자라’ 등을 갖추고 있다. ‘페이스 바’는 올드 상하이의 분위기가 짙게 묻어난다. 아편 침대에 누워 보브 클리코나 모엣샹동 같은 샴페인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라나 타이’와 ‘하자라’ 역시 스타일과 맛을 겸비했다. 1920년대, 신비와 불안이 공존하던 시기를 재현한 페이스 상하이는 언제나 이곳의 트렌드세터들과 젊은 외국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런 공간들이 몇 주간 힘들게 이어지게 마련인 차밭 순례를 앞두거나 마친 뒤 우리가 체험하는 신자본주의 중국의 현주소다. 그 밖의 나날들은? 로드 트립 때에는 절대 물 안 마시기, 뱀탕이나 개구리튀김 같은 별미는 예의바르게 거절하기, 산골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는 강아지가 와서 엉덩이를 물지 않나 주의하기 등 몇 가지 사항만 조심하면 향기 그윽한 차와 순박한 사람들, 탐험할 문화 유산으로 가득한 즐거운 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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