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과 선을 닦는 것은 같은 맛이라는 의미에서 예부터 다선일미茶禪一味 라고 했다. 차 마시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는 뜻이다.
절로 올라가는 길은 평탄했다. 너른 마당에 들어서니 오묘하게도 마음이 편안하다. 장군산將軍山 영평사永平寺. 산이 크지도 않건만 얼마나 듬직하기에 장군산이고, 절이 얼마나 편안하기에 영평사라 했을까. 이 산의 기운은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룡逆龍’이라 하여 세찬 명당이라 불린다고 한다.
영평사에 들어서 주지인 환성 스님을 찾았다. 스님은 절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차를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그 앞에 놓인 도구들이 범상치 않다. 차를 만드는 모습이긴 한데 물은 끓이지 않고, 찻주전자는 구석으로 제쳐둔 채 커다랗고 넓은 도자기 그릇을 앞에 놓으신다. 이 그릇을 연지라 한다고. 스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연지에 찬물을 채우더니 이제는 커다란 얼음까지 띄운다. 물이 차갑게 식자 한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모습, 살펴보니 냉동시켜놓은 연꽃이다. 통에서 꺼내어 물에 담그고 연꽃의 잎을 하나씩 조심스레 펼친다. 시간을 두고 한참을 정성스레 펼치니 드디어 물 위에 꽃이 피었다. 하얀 꽃잎도 제철에 딴 것처럼 그대로이고, 노란 분이 맺힌 꽃술도 그대로다. 연지 속에 핀 그 꽃에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벌 한 마리가 달려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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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음물에 차갑게 우려 마시는 백련꽃차. 오는 이마다 마실 수 있도록 잔의 개수도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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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소나무 밑의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완연한 봄기운이 소나무 사이 바람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왔다. 스님은 ‘비로소 봄이 느껴진다’며 조롱박으로 백련꽃차를 떠주신다. 방문객들은 내색은 못한 채 스님이 차를 만드는 동안 이것이 어떤 맛일까 조바심 내며 기다렸다. 한 모습 마시고 보니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큰 꽃으로 만든 꽃차다. 어쩌면 세계에서 으뜸으로 큰 꽃차일지도 모른다. 입 안으로 달콤한 꽃향이 형언할 수 없게 퍼진다. 참으로 달다. 이 차는 코로 향을 맞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음미하는 것이라고 스님이 말씀하신다. 차에서 어찌 이렇게 단맛이 나는 것이냐고 물으니 영평사의 물이 ‘너무 좋은 물이라 소문 내지 말라는 물’이라고 답하신다. 돌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가 이곳의 식수로 쓰인다. 백련꽃차는 7월, 8월에 연꽃이 만개했을 때 만든다. 연꽃은 낮에는 활짝 피었다가 저녁이면 꽃잎을 오므려 잠을 잔다. 그때, 꽃이 오므라들기 전에 작설차가 든 차주머니를 넣고 하룻밤을 재웠다가 다음 날 다시 꽃이 피기 전에 따서 연꽃차를 마신다. 예전에는 제철에만 먹을 수 있었지만 환성 스님은 냉동하는 방법을 알아내어 1년 내내 백련꽃차를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영평사에는 절 군데군데에 연꽃을 기를 수 있는 수조가 놓여 있지만 이것으로는 1년에 필요한 양을 채우기에 어림도 없다. 절 주변에 논 3천여 평이 연꽃밭이라고. 1년에 스님이 냉동해두는 연꽃만 2천여 송이다. 차가운 물에 차를 우려내는 것도 스님만의 독특한 방법이다. 다른 곳에서는 연꽃차를 만들 때 40~50℃의 따뜻한 물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렇게 마셔보니 차의 맛이 탁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스님이 고안한 해결법이 차가운 연꽃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생수에 얼음을 띄워 차를 만들면 아주 맑고 청량한 향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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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뜰에 뭍어둔 수조에 여름이면 백련꽃이 화사하게 핀다. 수조 이외에도 3천 평의 논에 연꽃을 기른다고. 2 작년 여름에 만들어 냉동해둔 백련꽃차. | |
백련꽃차는 몸을 정화하여 다이어트에 좋고, 여성들에게 특히 좋다고 한다. 연꽃은 강력한 정화작용을 하는 식물이다. 썩은 물에 연꽃을 심으면 물이 다시 맑아져 마셔도 될 정도로 정화가 된다. 또한 예전에는 연잎이나 연꽃을 으깨어 상처 부위에 붙여 지혈제로도 사용했었다. 한방에서는 연의 씨앗인 연밥을 심장약으로 사용하고 있다. 연꽃은 벌레도 생기지 않아 농약을 줄 필요도 없으니 믿을 수 있고, 다른 차처럼 카페인 걱정도 없어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다. 마당에서 백련차를 마시고 있자니 여러 계절이 동시에 느껴진다. 지난 겨울과 물러가는 봄을 피부로 느끼고, 연지 속의 백련꽃차로 입 속에 여름을 느낀다. 스님은 영평사에 왔으니 구절초차도 마셔야 한다며 차를 내오신다. 가을에 피는 구절초. 따뜻한 구절초차로 마음속에 가을까지 더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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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웅전 앞으로 영평사의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여름에 백련꽃 축제와 가을에 구절초 축제가 열리면 이 마당도 손님들로 분주해진다. 영평사의 환성 주지스님(오른쪽)은 조용한 마당에서 백련꽃차를 마시니 비로소 봄이 느껴진다 하셨다. | |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는 불자들뿐만 아니라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유명하다. 9월이 되면 영평사 전체가 하얀 구절초로 덮인다. 스님이 10여 년 동안이나 구절초를 가꿔온 덕이다. 스님이 구절초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국화차에 대적하기 위해서다. 향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 중국의 국화차인데, 스님은 이 차의 향이 너무 강해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래서 만든 것이 구절초차다. 향이 온화한 구절초가 국화차보다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다. 가을에 핀 하얀 구절초꽃을 손으로 일일이 따서 말려 만드는데, 이곳에서만 1년에 4천~5천 통을 만든다. 그래도 이듬해 2월이면 품절이 된다니 신도들 사이에 차의 인기가 대단한 듯하다. 구절초는 유명한 약초여서 예부터 그 이용이 많았다. 녹차도 많이 마시면 몸이 냉해져 적당히 마셔야 하지만 구절초는 몸을 따뜻하게 하며 장에 좋다. 특히 위장 장애가 있는 사람은 구절초차를 일주일만 마셔도 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구절초차를 만든 환성 스님도 구절초차를 마시고부터 속 쓰린 병이 나았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과 선을 닦는 것은 같은 맛’이라는 의미에서 예부터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했다. 차 마시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는 뜻이다. 절에서나 집에서나 다도를 까다롭게 여길 것은 아니다. 스님은 조용히 시간을 가지고 차를 마실 것을 당부한다. 차는 여러 사람이 두루 앉아 환담을 나누며 마시기에도 좋지만 사람이 많으면 조용히 마시기는 어렵다. 다도는 5명 이상이면 안 된다는 것이 이런 이유라고. 사실, 차는 혼자 마셔야 다선일미가 쉽다고 스님은 말씀하신다. 영평사에는 ‘차마실’이라는 차방이 따로 있다. 30~40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이곳도 구절초 축제를 하거나 할 때면 손님들이 많아져 꽤 붐빈다고. 축제 기간에는 절을 찾는 손님들만 5만~6만 명에 달한다. 그렇게 손님이 많을 때면 일일이 사람들을 접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스님은 절을 다녀가는 사람들에게 차 한 잔 권하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영평사는 템플 스테이도 활성화 되어 있으니 수행도 하고 차맛도 보려면 템플 스테이를 계획해보는 것도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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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정안IC로 나와 논산·공주 방면으로 10분 정도 간 후 조치원 종촌 방향으로 2분 정도 가서 반포 은용리 쪽으로 가다 보면 영평사 표지판이 나온다. 041-857-1854, www.youngpyungsa.org 주변 관광지 공주시의 명소인 무령왕릉을 둘러보거나 계룡산국립공원에서 가족과 나들이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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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년 9월부터 절 전체를 하얗게 덮는 구절초로 만든 구절초차. 말려놓으면 꽃잎에 약간의 붉은색이 생긴다. 2 유리 다관에 우린 구절초차. 중국의 국화차 등 다른 꽃차와 다르게 향이 은은하고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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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디터 : 이유진(프리랜서) / 사진 : 김동욱, 김병준, 어시스트 김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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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가득한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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