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의 복원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 등재권고'로 평가하여
유네스코(UNESCO)에 보고함으로써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확실시 되고 있다.
남한 산성을 셰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한국의 노력은 몇 년전 부터 시작되었다.
-2008년 10월 현재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과 주변 건물 그리고 좌전(종묘)의 복원을 마치고 남쪽 건물터는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행궁의 중요 건물이 복원 완료된 현재-
** 행궁의 내행전 남쪽 부분인 외행전과 정문인 한남문이 복원 완료되었다.
윗쪽의 짙은 색깔의 건물들보다 밝은 색깔의 건물들이 새로 복원된 건물들이다.
**안내도의 7번 건물은 이위정(정자)으로 외행전 복원시 추가되었고 4번 과 10번은 발굴지를 원형대로 보존 전시하고 있다.
-남한산성 종각과 동종-
** 산성 답사의 기점이 되는 산성로타리에서 행궁 쪽으로 올라가면 오른편에 남한산성 종각이 새로 지어져 있다.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天興寺 銅鐘)-
** 이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입지름 100cm로 고려 현종 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 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활을 하였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지고 해방 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의 종은 원형을 타종시 울림을 좋게하기 위하여 약 3배의 크기로 제작된 것이다.
-인화관(人和館) 복원 공사-
-복원 후 인화관 조감도-
**행궁 남쪽에 있는 인화관은 객사(客舍)건물이다.객사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거나 외국사신,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아래에 게시되는 남한산성 고지도 중앙에 인화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2014년 6월 30일로 1년간의 중건 공사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행궁의 정문 한남루-
**한남루는 유수 홍억(洪檍)에 의해 정조 22년(1798)에 세워졌으며 왕이 머무는 행궁의 하궐 앞에 자리한 외삼문의 주 출입구이다.
-한남루의 옛사진-
**1892~1893년 사이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남한산성행궁의 한남루 사진이다.
- 외행전 앞에서 보는 한남루-
-외행전-
**외행전(하궐)은 왕이 머무는 곳으로 삼도(三道)가 조성되어 있다.
-외행전(하궐) 옛 사진-
**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사진.
-내행전 과 외행전 사이-
-내행전(상궐)-
-내행전 옛 사진-
**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사진.
-내행전의 내부-
-통일신라 건물지-
**통일신라 건물지의 역사적 배경은 통일신라가 주장성을 쌓은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672)은 당나라 병력 5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
주장성은 당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한강 유역을 지키는 통일 신라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이위정(以威亭)-
** 이위정은 현재 좌승당 뒷편 후원에 2010년 중건되었다. 순조 17년(1817)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수 있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올라가지 마십시오-
** 두 명은 드러누워 자고 한 명은 느긋하게 앉아 있고...
성벽의 복원
-수어장대-
-수어장대 옛 사진-
**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사진
옛 사진에는 장대 2층에서 밖을 내다 보는데 지장이 없도록 현판을 걸어놓았으나 보수 후에는 현판이 시야를 가리도록 되어 있다.
-남한산성도{고지도첩(古地圖帖)}, 17세기 후반-
-현재의 남한산성 조감도-
** 남한 산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인류문화의 보편적 가치 기준에
부합함으로써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것은 적절한 것이고 우리문화의 우수성이고 자랑인것이다.
그러나 그 축성의 근본적 원리와 사상을 도외시 한채 관리유지 한다는 것은 보편적 가치를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문(지화문)성내-
-남문의 옛 사진(성내)-
**근대에 촬영된 유리원판 사진에는 이 문의 현판에 진남문(晉南門)이라고 되어 있으나 현재 걸려있는 현판(至和門)은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고 성남시가 만든 안내판에 기록되어있다.
정조보다 후대의 사진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고.....
-남문(성 밖)-
** 현재의 성문에는 안팎으로 지화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아래의 옛 사진에는 성밖 쪽으론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현판은 대개 한 곳에만 거는것이 통례이다.
-남문 옛 사진(성 밖)-
-개 보수 전후의 비교-
** 보수 후의 문루는 원형과 달리 4각형 서까래 한층을 더 올려 추녀가 두터워지고
따라서 박공의 공간이 좁아져 현판의 크기도 문루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것이 걸려있다.
-2008년 10월 30일 촬영-
-2014년 5월 1일 촬영-
**남문에서 남쪽으로 가는 성벽의 여장은 상당히 많이 비닐 덮개로 덮여있다, 최근에 보수한 여장의 하얀 조선회가
밀가루 처럼 부스러져 흘러 내리고 있다. 1개월 후면 세계문화유산이 될 문화재의 보수와 관리실태이다.
-동문 과 성벽-
-동문과 성벽 옛 사진-
--동문으로 내려가는 성벽-
-동문으로 내려가는 성벽 옛사진-
-서문 원경 옛 사진-
-북쪽 성벽-
-훼손된 남쪽 성벽 여장(2008년 10월)-
-허물어진 남쪽 성벽(2008년 10월)-
** 현재는 남쪽 성벽은 보수가 되었다.
-장경사 신지 옹성-
-제2 남옹성의 치성-
** 치성은 본성 성벽에서 돌출된 부분으로 공격하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 유리하게 축성한 것이다.
-제2 남옹성-
** 이 옹성의 전단은 보수가 되었으나 양측면의 성벽은 비닐망으로 덮어놓은 상태이다.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 산성의 옹성은 현대전의 전투전초(Combat Out Post) 또는 우리나라 DMZ에 있는 G P(Guard Post)와 동일한 개념이다.
즉 적의 접근을 조기에 경보하고 적을 조기에 전개시켜 전투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제1 남옹성에서 동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제2 남옹성의 치성-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중 3개의 옹성이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 하며 중요한 지형이나 취약지형을 선점하는것이다..(조감도 참조)
-제1 남 옹성 유지-
** 제1 남옹성은 보수의 손길이 전연 미치지 않은 곳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진에 유구를 표시하였다.
남한 산성의 옹성은 적의 접근이 용이한 완만한 지형에 설치하여 적을 조기에 경보하고 측면에서 공격 할 수 있는 축성법이다.
이러한 축성법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개념으로서 현대전에서 독트린으로 운용하는 전술개념과도 일치한다.
-옹성 전단에 설치된 포대의 8개의 총안-
-포대와 함께 전투를 지휘할 수 있는 축대가 폐허로 남겨져 있다.-
**남한 산성의 옹성 중에서 유일하게 전투지휘소가 설치된 곳이다.
산성으로서의 보편적 가치는 주거지인 행궁의 복원이 우선이 아니라 성곽 본연의 목적인 축성과 축성을 뒷받침하는
전략과 전술적 철학에 있는 것이다. 남한 산성만이 가지는 독특한 전술의 구현을 위한 축성(옹성) 복원을 도외시 한 채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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