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류봉과 옥계폭포
달까지 반해버린 풍경이라 해서 월류봉(月留峰), 달이 머무는 봉우리다. 해발 400m짜리 작은 산을 38만km 바깥 우주에 떠 있는 달이 눈치챘다니, 달은 참 시력도 좋다. 자, 이 우주적 비경(秘境)에 봄이 왔다. 봄으로 가는 코스는 월류봉-직지사-옥계폭포-다시 월류봉.
월류봉은 충북 영동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황간IC에서 10분 거리다. 한적한 마을을 지나 도로 모퉁이를 돌면 월류봉 이정표가 느닷없이 나타난다. 월류봉 자체의 출현도 이정표만큼이나 느닷없다.
주차장 난간에 기대어 봉우리 위 정자를 바라보며 5분만 기다리시라. 흐르는 능선과 삐져나온 작은 봉우리, 그 위 정자가 갑자기 실제 풍경이 아니라 초대형 3D 영화의 한 씬으로 변해버린다. 백두나 한라처럼 거대하지 않아,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풍경 속에 산맥과 봉우리와 강(江)과 정자가 다 있다. 그래서 정자에 눈을 고정하고 걸음을 옮기면 영화 촬영을 하듯 뒤쪽 능선이 움직이며 입체감을 만든다. 거기에 상상 속 네모틀을 씌우면 그게 바로 입체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비현실적인 경험을 한다.
우암 송시열도 그랬을 것이다. 얼마나 월류봉에 매혹됐으면 이 노론의 거두가 한때 이곳에 집을 짓고 은거했을까. 그가 살던 집은 사라지고, 집이 있던 자리에 유허비가 서 있으니 그 자신도 풍경의 한 요소가 되었다.
봉우리에 있는 정자 월류정은 사다리도 없고 계단도 없어서 올라갈 방도가 없는 공갈 정자다. 그런데 정자가 없으면 졸지에 풍경은 시무룩해지니, 정자를 만든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싶다.
이때쯤 점심 무렵이면 좋겠다. 직지사로 간다. 담벼락 아래 핀 수선화, 물길 건너 산수유, 산새들, 절집 꽃문들, 밥 짓는 굴뚝 연기, 잿빛 승복 입고 총총히 걸어가는 스님네들…. 이 큰 절에 봄이 반짝인다. 봄날 직지사는 용맹정진의 도량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하다. 나라가 지정한 국보와 보물도 많으니 느릿느릿 봄을 구경하면서 절을 샅샅이 구경한다.
사하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회귀. 월류봉쪽으로 가다가 4번국도로 갈아탄다. 오른편에 노근리평화공원이 나온다. 6·25 전쟁 때 미군에 희생된 노근리 사람들을 기리는 공원이다. 넓은 공원에 각종 추념물이 서 있고 기념관에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소상하게 기록해놓았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쌍굴다리를 꼭 봐야 한다.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진 곳이다. 양쪽 콘크리트벽에는 그때 퍼부어댄 탄환 흔적들이 페인트로 표시돼 있다. 모르고 보면 예술작품이고, 알고 보면 슬픈 우리들의 현대사 기록이다.
4번국도를 타고 길을 잇는다. 도로공사가 한창인 구간도 지나고 영동군청이 있는 번화가도 지난다. 이정표에 ‘옥계폭포’가 나타난다.
난계 박연은 악성(樂聖)이다. 세종은 평범한 관료였던 박연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 인재 배치의 원칙에 따라 궁중음악 정리 프로젝트를 맡겼다. 대제학까지 올랐던 그는 세조가 나라를 차지한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4년 만에 죽었다. 가야금을 튕기면 금수(禽獸)가 춤을 췄다는 그였다.
그가 사랑한 곳이 고향 땅에 있는 옥계폭포다. 공사로 정신없는 길을 지나 무지하게 큰 불상을 조성중인 절도 지나면 나온다. 박연은 폭포 앞에서 피리를 즐겨 불었다. 안내문은 이 폭포가 음기(陰氣)가 강한 여자 폭포라(‘여자가 누운 형국’이라는 생김새를 보면 대충 짐작이 된다) 그 앞에 양기가 센 바위를 놓았고, 폭포수로 목욕을 하면 없던 아이가 생긴다고 했다.
그런데 폭포 주변은 문화적으로 쑥대밭이 됐다. 없어야 할 화강암 구름다리, 없어야 할 정자, 없어야 할 폭포 아래 소(沼)의 인공 제방. 그게 다 있다. 그래서 폭포 앞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마음 속에서 그 없어야 할 것들을 다 삭제하는 것이다. 그래야 악성의 피리와 가야금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지금이 저렇게 폭포 수량이 많을 때인가? 영동군은 물이 마르는 계절이 되면 저수지 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폭포 위에서 퍼붓는다. 지금이 그때다. 옥계(玉溪)라는 이름이 민망하게, 아이 낳게 해주는 폭포수도 그래서 물빛이 탁하다. 다시 강조컨대, 상―상―력. 소소하게 산행도 해본다. 폭포가 있는 산 이름은 월이산(月伊山). 달이산이라고도 한다. 산 속을 헤매며 이름 예쁜 처녀 달이를 찾아본다.
직지사에서 끼니를 못 때웠다면 오히려 행운일 수 있다. 폭포 주차장에 있는 폭포가든은 우렁쌈밥이 유명하다. 주말에는 30분 정도 기다리는 건 예사다.
길을 다시 돌려 월류봉으로 간다. 해가 뉘엿하게 저물고 어딘가에 새하얀 달이 떠 있으면 좋겠다. 드디어 마법의 순간(magic hour)가 도래한다. 삼라만상의 윤곽이 아직 뚜렷하되 순식간에 만물이 실루엣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때가 오면 하늘을 본다. 아직 푸른 빛을 발하는 하늘에서 달이 능선에 내려앉아 있으면 행운이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대신 달빛과 앙숙지간인 별들이 능선에서 솟는다. 달이 매혹당했던 우주적인 풍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거대한 풍경 속에서 우리들은 물아일여(物我一如), 우주와 함께 노닐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의 여행 (0) | 2014.05.19 |
---|---|
행궁의 복원 (0) | 2014.05.18 |
야생차 만발한 경남 하동으로의 여행 (0) | 2012.11.18 |
날아라, 철새! 느껴라, 대자연의 자유! (0) | 2012.03.19 |
청정 산책로… 여기가 서울이라고? (0) | 2011.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