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비 오는 날

추억66 2012. 11. 27. 23:35

 

비 오는 날

임 석 재
여러가지 얼굴을 가진 비… 소년을 집에 가뒀네
장석주·시인

 

 

조록조록 조록조록 비가 내리네.
나가 놀까 말까 하늘만 보네.

쪼록쪼록 쪼록쪼록 비가 막 오네.
창수네 집 갈래도 갈 수가 없네.

주룩주룩 주룩주룩 비가 더 오네.
찾아오는 친구가 하나도 없네.

쭈룩쭈룩 쭈룩쭈룩 비가 오는데
누나 옆에 앉아서 공부나 하자.

비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 진 켈리가 나오는 영화 《싱잉 인 더 레인》(Singin' in the Rain)을 떠올려 보라. '사랑은 비를 타고' 오고 사랑에 빠진 남자는 빗속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비가 오면 봄의 초본식물들은 키가 쑥쑥 자라고, 버섯은 자라나 포자를 퍼뜨리고, 달팽이들은 사랑을 나눈다. 태양의 업적들이 과대평가된 반면에 비에 대한 평판은 좋은 편이 아니다. 비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것은 비가 종종 소풍과 행사와 잔치를 망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는 종종 사랑의 낭만적 매개자다. 비가 없다면 프랑스와 중국과 영국과 인도와 터키와 베트남에서 그 많은 낭만적 시와 소설과 영화들은 아예 세상에 나올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비라고 해서 다 같은 비가 아니다. 생긴 모양이 다르고, 내리는 모습이 다르고, 내릴 때 소리가 다르다. 비는 강약에 따라 조록조록도 내리고 쪼록쪼록도 내린다. 또 주룩주룩도 내리고 쭈룩쭈룩도 내린다. 시인은 몇 개의 간단한 부사어로 비 내리는 광경을 차별화하는 마술 같은 솜씨를 보여준다. 비가 오자 소년의 집은 빗속에 포위된다. 비는 오고 감을 막고, 소년을 권태에 가둔다. 이 뜻밖의 나른한 권태에 어쩔 줄 몰라 뒹굴뒹굴 하던 소년은 마침내 누나 옆에서 얌전히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한다. 조록조록과 쪼록쪼록 사이에서, 주룩주룩과 쭈룩쭈룩 사이에서 몸을 쓰는 일에 제약을 받고 외적 활동이 제한된다면 거꾸로 소년의 내면 삶은 풍부해질 터다.

이 동시를 지은 임석재(1903~1998)는 문단보다는 학계와 민속학 쪽에서 더 이름이 난 분이다.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 사범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한편으로 동요와 동시, 동화들을 남겼는데, 〈비 오는 날〉은 그중의 한편이다. 비가 불러온 이 뜻밖의 휴지기(休止期), 발랄한 몸짓을 멈추게 한 정일(靜逸)의 한때가 해 나는 날이 있으면 비 오는 날도 있고, 세상 일이 제 뜻대로만 될 수 없다는 깨달음과 더불어 소년을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 보약 같은 보탬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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