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러스트 윤종태
'그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혹은 '그런 모양으로 줄곧' 등이다. '그냥 내버려두다' 혹은 '그냥 기다리고만 있다'라고 할 때의 '그냥'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경우다. 그런데 '그냥'은 또한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란 뜻도 있다. '그냥 주는 돈이 아니다'라고 할 때의 '그냥'이 이에 속한다. 그렇다면 위 시의 '그냥'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
문삼석(67) 시인은 엄마와 아이의 사랑을 '그냥'이라는 말 속에 함축했다. 아이와 엄마는 막 잠에서 깨어 서로의 몸을 간질이며 까르르 웃고 있는 중이다. 엄마가 아이의 몸에 살짝 손을 대기만 해도 아이는 몸을 오그리며 숨이 넘어가도록 킥킥댄다. 아니다. 아이는 일하는 엄마 옆에서 방바닥에 배를 대고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힘겹게 글씨를 쓰고 덧셈을 하는 아이를 언뜻언뜻 돌아보며 엄마는 잠시 일하던 손을 놓고 빙그레 웃는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이 시 속의 아이와 엄마는 서로 '마주본다'.
이 마주봄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궁극, 절대적 신뢰의 한 표현이다. 그것은 터져 나올 것 같은 행복의 비명이자 살아 있음에 대한 환희이기도 하다. 이 숨 막힐 것 같은 사랑의 회오리 속에서 아이는 저도 모르게 묻는다. 엄만 내가 왜 좋아? 이것은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다. 아이는 다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충만한 사랑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을 표현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시의 '그냥' 역시 답이되 답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그 어떤 의미도 이 시의 '그냥'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
"엄마는 아가를/ 품속에 안고서도/ "아가야, 아가야."/ 아가만 부르지요."(〈엄마와 아가〉)라거나 "엄마는 나 몰래 나가셨지만/ 어디 계시는지 난 다 알지요./ 달그락달그락 그릇 소리가/ 부엌에 계신다고 알려 주거든요."(〈난 알지요〉)라고 노래할 때, 문삼석 시인은 이미 아이와 엄마의 사랑은 설명 불가능의 영역, 즉 이른바 '언어도단'의 경지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그냥'은 존재하는 것들이 내지르는 신음소리에 가깝다. 세상의 어떤 사전에도 이때의 '그냥'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의 용례는 오로지 시인의 작업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이 새로운 말의 창조자라는 이야기는 괜한 소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