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TV이야기

동이

추억66 2010. 5. 18. 15:22

MBC 드라마 < 동이 > .

ⓒ MBC


장 희빈(이소연 분)과 명성대비(박정수 분) 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MBC 드라마 < 동이 > . 지난 17일 제17부에서는 장 희빈의 걸림돌인 명성대비를 죽이기 위한 장희재의 움직임이 전개되는 가운데, 감찰궁녀 동이(한효주 분)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인현왕후(박하선 분)의 밀명 하에 감찰부 정 상궁(김혜선 분) 중심으로 구성된 비밀 TF(태스크포스)에 포함된 동이. 주어진 임무는 누가 명성대비를 죽이려 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죽은 친오빠의 친구인 차천수(배수빈 분)의 도움을 받아 비밀수사에 나선 동이는, 명성대비의 건강문제 배후에 장희빈 처소의 나인이 있다는 단서를 포착한다.

이제까지,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들을 번번이 해결하여 '명탐정'의 명성을 쌓아온 동이. 비록 천수 오빠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멋지게 범인을 찾아낸다면 동이는 가장 유능한 감찰궁녀로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번 사건을 '잘' 해결하면, 장희빈 측의 미움과 경계를 단단히 사기는 하겠지만.

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숨은 주역으로서, 자신의 첫아이를 죽이려 한 장희빈을 결국 파멸로 몰아넣고 나아가 영조라는 걸출한 군주를 길러낸 최 숙빈(숙빈 최씨, 동이는 실명 아님; 1670~1718년). 그 최숙빈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 < 동이 > 에서는 위와 같이 궁녀 시절의 최숙빈을 유능한 감찰궁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럼, 실제의 최 숙빈은 어떠했을까? 그는 궁녀 시절에 어떤 직무를 담당했을까? 그는 과연 '머리' 쓰고 '펜대' 굴리는 곳에 있었을까?

실제 동이는 궁녀 시절, 어떤 직무를 담당했을까

조선 후기 당쟁사를 다룬 이문정(1656~1726년)의 < 수문록 > 이나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수록한 김용숙의 <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 등을 종합하면, 인현왕후 처소의 지밀나인이 되는 행운을 얻기 이전에 최 숙빈은 오래도록 침방나인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자 그대로 '지극히 은밀한 곳'을 의미하는 지밀(至密)은 임금·왕비·대비 등의 처소를, 침방(針房)은 바느질을 담당한 내명부 부서를 지칭한다. 그리고 나인(內人)이란 궁녀의 별칭으로서 항아·홍수·궁인 등과 동의어다.

<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 에 실린 구한말 후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최 숙빈과 영조의 대화를 후궁들에게 들려주면서 "최 숙빈은 침방나인 출신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영조의 5대손인 고종은 왕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기초로 "최 숙빈은 침방나인 출신이었다"고 발언한 것이다.

고종이 후궁들에게 들려준 일화에 따르면, 하루는 어머니 최 숙빈과 아들 영조(연잉군) 사이에 '어머니의 과거'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최 숙빈의 생전에는 영조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으므로, 이 대화가 있은 때의 영조는 연잉군이라는 왕자 신분을 갖고 있었다.





최숙빈의 아들인 영조. 사진은 51세 때의 모습.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연잉군: "침방에 계실 때에 무슨 일이 가장 하시기 어려우셨습니까?"
최숙빈: "중누비·오목누비·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두 모자의 대화를 통해, 최 숙빈이 본래 침방나인 즉 침방궁녀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속의 화려한 감찰궁녀 생활과 달리, 실제의 최 숙빈은 고달픈 침방나인 생활을 했던 것이다. 최 숙빈이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는 그의 회고 속에 잘 나타난다. 그는 누비 만드는 일이 힘들었노라고 장성한 아들에게 토로했다.

누비란 것은 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죽죽 지게 바느질한 옷을 말한다. 솜을 그냥 집어넣으면 솜이 옷 아래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줄이 죽죽 지게 바느질을 함으로써 솜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겨울에 입는 파카나 점퍼도 기본적으로 누비와 똑같은 원리로 만든 것이다. 예비역 군인들이 겨울에 입는 노란 조끼 역시 마찬가지다.

최 숙빈의 코멘트에 나온 중누비란 것은 줄의 간격이 듬성듬성한 것이고, 오목누비란 줄을 굵게 잡아 골이 깊은 것이다. 납작누비란 것은 오목누비의 반대개념으로 보인다. 최 숙빈은 이런 중누비·오목누비·납작누비를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세누비를 만드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세누비란 촘촘하고 고운 누비를 말한다. 그만큼 바느질을 많이 요하는 누비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천에 촘촘하게 바느질을 하는 것도 힘든데, 천 사이로 솜을 두툼히 넣고 촘촘하게 바느질을 하는 것은 더욱 더 힘든 일이다. 10대의 어린 궁녀가 침방에 앉아 세누비를 만든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인내심을 요하는 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세누비가 가장 힘들었습니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연잉군이 울컥 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힘들게 사셨구나!'라는 생각에, 찡 하는 뭔가가 머리를 스쳐가고 가슴도 스쳐갔을 것이다.

어머니의 회고를 들은 영조는 그 자리에서 누비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옷을 입지 않았다. 누비를 만드느라 고생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차마' 누비옷을 입고 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일화가 영조에게 얼마나 큰일이었으면, 그 후로 조선 왕실에 대대적 전승되다가 5대손인 고종이 궁궐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듯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방직회사 여공과 그 회사 사장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자기 어머니가 예전에 여공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공과 의류를 대하는 시선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연잉군의 심정도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누비 가장 힘들다는 말에 누비옷 벗어던진 영조





최숙빈의 무덤인 소령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 한국학중앙연구원 < 숙빈최씨 자료집 > 4


1970~1980년대에 서울 영등포에는 방직회사 여공들이 많이 살았다. 보통 10대에서 20대 정도인 그 '여공 누나들' 중에는, 행사장에서 끼는 흰 장갑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들이 흰 장갑을 낀 것은 행사장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직기계로 손상된 신체 일부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겠지만, 옷감을 다루는 일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물론 최 숙빈의 시대에는 방직기계 때문에 커다란 신체적 손상을 입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어린 10대 궁녀가 두 눈에 바짝 힘을 주고 손가락에 신경을 집중하면서 하루 종일 바느질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나이 7세에 궁녀가 된 어린 소녀가 별다른 비전도 없이 사시사철 바느질만 하고 살았다면,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가슴은 짠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조는 자기 어머니가 그런 생활을 했다는 걸 알고는, 다시는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 노찾사의 명곡 < 사계 > 를 알 리 없는 영조이지만, 그 시대에 그 노래가 있었다면 영조의 18번은 아마도 < 사계 > 가 되었을지 모른다.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 ……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여도 …… '침방'엔 작업등이 밤새 비추고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조선시대 '여공' 최 숙빈은 그렇게 사계(四季) 내내 '미싱'만 돌리고 돌리며 고생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인현왕후 처소의 지밀나인 생활을 거쳐 우연히 숙종을 알게 되어 후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감찰궁녀처럼 머리 쓰고 펜대 굴리는 일은 소녀 시절의 최 숙빈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힘든 10대를 보냈으니, 최 숙빈이란 여인이 얼마나 악착같고 지독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여인을 만만하게 보고 싸움을 걸었으니, 장 희빈은 사람을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