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주연.강일구] #1. “내 병이 유전됩니까?” 이제 막 간암 3기 판정을 받은 바짝 메마른 모습의 노인(최불암 분)이 의사에게 묻는다. 의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노인은 “남기고 갈 게 없는데 이걸 남길 수는 없다”며 유전 여부를 재차 묻는다. 자식에게 자신의 병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다. 가족 간의 끈끈한 애정을 그린 SBS 주말드라마 '그대 웃어요'의 한 장면이다.
#2. “어머니의 유방암이 유전될까요?” 미혼 여성인 정지우(가명·30)씨는 최근 이모(49)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단 얘기에 덜컥 겁이 나 병원을 찾았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병력이 있었다. 유전클리닉 검사 결과 그녀에게도 유방암 발병 유전자인 BRCA1/2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의사는 그녀에게 매년 유방암 정기검진을 받으면서 적정 체중을 유지하라고 권했다.
전체 암 중 '유전성' 5~10%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내가 앞으로 어떤 병에 걸릴지, 또 어떤 지병으로 사망할지 부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식은 외모뿐 아니라 암과 성인병, 성격이나 식생활 습관까지 닮는다. 의학계에서 유전력과 가계력을 진단의 주요 지표로 삼는 이유다. 모계나 부계로부터 질환을 대물림하는 첫째 이유는 유전자 때문이다.
인간의 세포에는 약 2만8000개의 유전자가 있어 개인의 형질을 결정한다. 각각의 유전자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받은 46개의 염색체로 구성되며, 각 염색체는 5000만~2억5000만 개의 염기로 구성돼 있다. 이때 염기가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유전자의 기능이 결정된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클리닉 유한욱(소아청소년병원장) 교수는 “유전자는 쉽게 말해 서가에 꽂힌 2만8000권의 책과 같다”고 말했다. 어떤 책은 글자가 빽빽하거나 인쇄가 잘못될 수 있고, 글자 순서가 어떻게 나열되는지에 따라 단어와 문장이 엉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혈우병·근이양증 등이 대표적인 유전 질환이다. 유전력이 강한 암으로는 유방암·난소암·대장암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체 암 중 유전성 암에 걸리는 환자는 5~10%다.
둘째는 유전적 소인이다. 위암이나 일부 갑상선암, 심근경색증 등 심장질환, 생활 습관병인 고혈압과 당뇨병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개인차가 있지만 유전적 소인이 환경과 결합해 질환을 야기한다. 당뇨병 소인이 있는 사람이 체중 과다에 운동까지 하지 않으면 이른 나이에 당뇨병에 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유전질환은 어쩔 수 없어도 유전적 소인을 가진 사람은 질병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 질병을 유발하는 고위험 요인을 피하는 것이다.
셋째는 가족의 특성이다. 간암은 유전력보다는 B형 간염 바이러스가, 위암은 헬리코박터균이 자녀에게 전파돼 장기적으로 발암 가능성을 높인다. 짜게 먹는 식습관, 흡연력, 불규칙한 생활 태도 등도 가족병력과 관련된 질병 유발 요인이다.
50세 이전 사망한 사람 있는지 주목해야
자신의 질병 유전자를 정확하게 찾기 위해선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모든 유전자형이 밝혀지지 않았고, 검사 또한 대중화돼 있지 않다. 유 교수는 “특히 생활습관이나 식습관은 가족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을 따져 보면 질병 가족력을 살펴보는 게 더 유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력을 따질 때는 조부모·부모·형제자매·자녀 등 3세대 이상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질병 정보를 모아야 한다. 먼 친척이거나 돌아가신 분은 정보를 얻기 어려우니 설 연휴처럼 일가 친척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가족력 족보를 작성하는 게 좋다.
혈연 관계에 따라 족보를 그리고 각 사람의 성별과 나이, 주요 병력을 적는다. 돌아가신 분은 사망 원인을 쓰고, 특히 돌연사하거나 젊어서 사망한 경우엔 반드시 기록한다.
이때 부모·자식 간 2세대 이상에서 나타난 질환이 유의해야 할 가족병력이다. 원자력병원 암유전상담클리닉 이진경(진단검사의학과) 과장은 “같은 질환이 있는 가족 구성원이 많을수록 질병 발생 위험도가 크다”며 “그중에서도 해당 질환으로 50세 이전에 사망한 가족이 있거나 발병한 형제자매가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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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력 있다면 정기검진 시기 당기도록
가족력 질환을 예방하는 첫째 수칙은 위험 요인을 피하는 것이다.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 위험도가 높아지므로 다른 사람보다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발병 가능성의 80%는 생활습관과 가계력을 파악해 예방하면 근절할 수 있다.
둘째는 정기검진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 대장암 가족력이 있다면 일반인보다 빠른 20세 이상부터 대장내시경 검사를 자주 받도록 한다.
서울아산병원 대장항문외과 유창식 교수는 “전체 대장암 환자 중 3~5%는 유전성 비용종증, 1%는 가족성 용종증”이라며 “대장암은 조기 발견 시 90%가 완치되므로 정기검진만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했다.
고혈압 가계력이 있다면 비만을 개선해 혈압을 안정시키고, 반드시 금연해야 한다. 담배의 니코틴 성분이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가족 중 암이나 심장질환자가 있다면 육류와 소시지·치즈에 많은 포화지방산의 섭취를 줄이고 술을 삼간다. 짠 음식은 피하고 섬유질이 많은 채식 위주로 식습관으로 바꾸는 노력도 필요하다.
글=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