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많이 발생하는 혈전으로 인한 질환이 국내에서도 부쩍 늘고 있다. 수도관이 오래 되면 녹이 슬고 이물질이 쌓여 물이 잘 나오지 않듯이 혈관도 노후하거나 손상되면 혈관 내피 하부의 결합조직이 노출되고, 여기에 혈소판이 엉겨 붙으면서 혈전이 생긴다. 고령 인구 증가에 따른 인공관절수술 급증과 식생활 서구화, 고혈압, 복부 비만, 고지혈증 등 대사증후군을 앓는 사람이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죽음의 덩어리'로 불리는 혈전 중 정맥에서 생기는 혈전에 대해 알아본다.
인공관절 수술 후 생기기 쉬워
정맥에서 생긴 혈전이 혈관을 막은 것을 정맥혈전색전증이라고 한다. 병원 내 사망자의 10%가 이 때문일 정도로 무서운 질환이다. 유럽에서는 정맥 혈전 관련 질환이 연간 150만건이 넘어섰고, 매년 54만여명이 이로 인해 사망한다. 우리나라의 정맥혈전색전증 발병 통계자료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유럽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맥혈전색전증으로는 심부(深部)정맥을 막는 심부정맥혈전증, 폐동맥을 막는 폐색전증, 통증 부종 과색소침착 궤양 등이 나타나는 혈전후증후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허벅지나 종아리 등 다리의 심부정맥(다리에 위치한 깊은 부위의 정맥)에 혈전이 생기는 하지 심부정맥혈전증이 가장 많이 생긴다.
하지 심부정맥혈전증의 주 증상은 다리 통증과 부종이지만 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합병증으로 통증과 다리에 궤양이 생기는 혈전후증후군이 생길 수 있다. 재발한 궤양 때문에 다리가 썩기도 한다.
또한 다리 정맥에서 생긴 혈전이 혈류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폐로 이동해 폐동맥을 막는 폐색전증도 늘어나고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인 중의 하나도 폐색전증이다. 폐색전증이 생기면 호흡이 곤란해지고 피를 토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아프고 어지럽고 실신하기도 한다. 폐색전증의 10~25%는 2시간 내 사망한다. 돌연사하지 않아도 폐포과호흡, 폐 내부 혈관 저항의 증가, 부종 등이 생기면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인공관절수술 피할 필요는 없어
정맥혈전색전증의 주 원인은 엉덩이관절과 무릎관절을 바꾸는 인공관절수술이다. 인공관절수술은 질병이나 노화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관절을 인공관절로 바꿔줌으로써 해당 부위의 통증을 없애고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한다. 주로 무릎 관절이 약한 노년층이 많이 수술해 '효도 수술'이라고 불린다.
인공관절수술 과정에서 혈관이 손상되고, 혈류가 느려지며, 혈액 응고가 항진돼 다리에 혈전이 생긴다. 또한 수술로 인해 장기간 움직이지 못해도 혈전이 생긴다.
인공관절수술이 정맥혈전색전증을 일으킨다고 해서 수술을 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적절히 대처하면 이를 예방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예방법이 혈액응고억제제를 투여하는 것이다.
표준적으로 쓰이는 혈액응고억제제는 주사제인 '저분자량 헤파린'과 먹는 약인 '와파린'이다. 헤파린은 즉시 효과가 나타나고, 와파린은 36~48시간 뒤에 효력이 생긴다. 헤파린이나 와파린은 과량 투여에 의한 출혈 부작용으로 빈번히 사망해 투여량에 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헤파린은 생리적 응고 저해인자인 항트롬빈3을 통해 트롬빈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항응고 효과를 나타낸다. 부작용으로 혈소판 감소증이 나타날 수 있으며, 3~6개월 이상 장기 투여하면 골다공증을 일으킬 수 있다. 와파린은 간에서 비타민K 합성을 저해해 비타민K 의존성 응고 인자 생성을 억제함으로써 응고를 막는다.
하루 한 번 먹으면서 모니터링을 하지 않아도 되는 혈액응고억제제가 지난해 초 출시됐다. 바이엘쉐링제약의 '자렐토'(성분명 리바록사반)가 바로 그것이다. 전 세계 1만2,500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연구에서 엉덩이관절 치환술을 받은 환자가 자렐토를 먹을 경우 저분자량 헤파린을 주사한 환자보다 정맥혈전색전증에 걸릴 위험이 70%나 낮아졌다.
걷기ㆍ수영 등이 예방에 좋아
정맥혈전색전증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방하려면 건강한 영양식 프로그램과 함께 정상적인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 의사 권고에 따라 고혈압을 조절하고 걷기나 수영을 해야 한다. 특히 걷기 운동을 하면 발끝에서 심장까지 혈액순환을 도와 종아리 근육을 단련시켜 준다. 또한 가끔씩 다리를 심장보다 높이 드는 것도 좋다. 1시간 이상 앉거나 서있지 말고 다리를 꼬아 앉지 말아야 한다.
혈전 생성 위험이 높은 사람은 비행기 여행을 하면서 자세를 자주 바꾸는 것이 좋고, 압박스타킹을 착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염분 섭취를 줄이고 혈액이 농축되지 않도록 자주 물을 마시면 좋다. 동물성 지방 섭취를 줄이고 등푸른 생선에 많이 함유된 오메가3 지방산과 올리브유 콩기름 같은 식물성 기름에 많이 든 오메가6 지방산을 섭취해도 혈전 예방에 좋다. 특히 등푸른 생선에 들어 있는 불宅?峙譯遠?일종인 EPA는 혈전 예방에 탁월하다.
일러스트=김경진기자 jinji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