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동지이자, 동반자였던 김대중 대통령과 이휘호 여사
새벽녁. 라디오를 틀었다. 최성수의 '동행'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오늘따라 색 바랜 사진처럼, 무거워졌다, 가볍기를 반복한다. 철 지난 대중가요가 가슴에 파고 든다. 님을 위한 행진곡보다, 윤이상의 섬뜩한 음률보다. 암울했고 끝모를 한국현대사의 터널 속에서 함께 울고, 빈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던 두 사람이 떠오른다.40년 동안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의 생사와 영광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이희호 여사가 있었다.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 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밤을 오가는 날은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곳 모르고 외로워 헤메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가슴 채울 때 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 까지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가슴 채울 때 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 까지
동행의 가사를 마음으로 따라가다, 문득 동교동자택에 걸려있는 문패를 떠올렸다. 김대중,이희호.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남녀평등을 이 땅에 심어내기 위한 신호탄이자 작은 발언이었다. 명패의 담긴 뜻은 추후 여성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호주제폐지 등 남녀평등의 가교역할을 해내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일깨워 준, 나란히 적힌 두사람의 이름.문패는 문패를 넘어 남녀가 동행자로서 인생의 동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철학과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그 어떤 교과서의 글보다, 이 한장의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각별하고 뜻깊다. 동행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의해 지난 민주,참여 정부에 대한 단절의 역사가 계속 되고 있는 현실,권위와 차별, 나홀로 독선만 가득찬 세상에서 동행(함께걸음)이 사뭇치고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꽃은 졌지만, 국민들의 추모열기로 꽃 피울 피워갈 인동초 김대중. 파란만장했던 한국현대사와 중심에서 역정의 삶을 살았던 김대중. 곁에는 항상 이희호 여사가 있었다. 인동초가 군사정권이 내린 사형선고을 받고 옥중생활을 할 때도 감옥 밖에서 마음의 인동초를 꽃 피웠던 이희호. 이희호 여사는 1962년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 하기 전까지 한국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미국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엘리트 여성 운동가였다. 이희호 여사가 없었다면 현실세계에서 인동초 김대중은 고난 속에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 9월 17일 내란음모사건으로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82년 12월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될 때까지 감옥에서 쓴 옥중편지(엽서). 깨알같은 글마다 , 첫머리에는 언제나 ‘존경하는 당신’으로 시작된다. 진정 사랑하지 않고, 마음에 우러나지 않는다면 이런 표현을 부부간에 쓰기가 싶지 않을 터인데. 김대중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도,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마칠 때까지, 이희호 여사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김대중 대통령을 향한 존경과 사랑.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부부상을 이야기 할 때, 동교동 자택에 나란히 걸려있는 문패이야기를 한다. ‘金大中’, ‘李姬鎬’. 부부를 넘어, 평생을 함께한 동지로서, 한국의 남녀평등을 향한 징표로써 기억할 것이다.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은 한국 현대사의 편린이자,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한 길의 역사였다. 그 길은 바로 민주, 통일이었다. 3년 동안의 집필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진행에 앞서 출간된 동행은 김대중 자선전을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병실을 지켰다. 인동초의 죽음에 끝내 오열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난 세월 이희호 여사가 흘린 눈물과 상처는 얼마나 컸을까. 마음 속에 흘린 남편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의 눈물 넘어 이제 인동초는 졌지만, 이희호여사의 마음 속에 또 다른 인동초의 줄기는 자랄 것이다. 46년을 함께 걸어온 길. 김대중 대통령의 훌륭한 내조자로서, 친구로서, 동지였던 이희호 여사. 김대중 대통령 서거의 아픔 못지않게 이희호 여사가 눈에 가득 차게 들어오는 이유다. 죽어 살아갈 김대중 못지않게, 김대중의 동행자로 기억되어야 이희호 여사, 마음 어디인가에 겹겹이 쌓여 있을 고통과 슬픔의 세월을 지워버리길 바라며.
병석에 누워 손이 차가워진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장갑을 끼워줬던 이희호 여사. 마지막 선물이자 마음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이희호여사는 현모양처가 아니었다. 현모양처라는 남성적, 일방적 강요와 이상향을 넘어 김대중 대통령이 오늘날까지 이어온 민주평화의 궤적을 이루어 내었던 일등공신이자, 어쩌면 김대중 대통령을 뛰어 넘는 지성인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자였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었지만, 동행 할 수 있었던 시대의 두 자화상은 두고두고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향이 되고 믿음이 되길 바란다.
오늘 뚫어지게 문패를 바라보며, 마음의 눈물을 흘린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은 신입생 환영회에서조차 수줍어 고개를 잘 들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남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마음껏 호연지기를 뽐냈다. 이 불공평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 남녀공학 체험은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 <서울대 사범대와 ‘면학동지회’>(34쪽)에서
나는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전공을 살려 1964년 1년 동안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 노동여성 실태 조사를 벌여 9개 산업별 노조 여성 대표들과 좌담회를 열었다. 또한 근로 여성 실태 조사를 1968년까지 꾸준히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여기서 얻어진 결과를 토대로 보고서를 출간했다. 분야별로 직업여성클럽을 조직하여 단결된 하나의 목소리로 결집하는 노력을 병행했다. 1968년, 1969년, 1970년 세 차례에 걸친 세미나에서 실상과 대책을 발표해 사회에 호소하고 정부 정책에 반영하도록 했다.
― <‘엄마’와 ‘사모님’으로>(75쪽)에서
조금 기다리니 전 대통령이 들어오기에 사전 교육을 받은 대로 일어났다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뭐랄까, 스스럼이 없었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이 없었다. (…) 나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 때로는 바지 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거리면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독특한 분이었다. (…) 세월이 흘러 ‘국민의 정부’ 시절에 전직 대통령들을 자주 초청해 국정에 대해 설명하고 의견을 들었다. 대통령 테이블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리고 배우자 테이블에서는 이순자 여사가 화제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 <전두환 대통령과 독대하다>(231~2쪽)에서
백화원 영빈관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있던 김 위원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먼저 들어가도록 예우했다. 이전까지의 풍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영빈관에서잠시 환담을 나눌 때부터 나는 김 위원장을 눈여겨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는 대통령은 물론 장관과 수석 등 수행원들에게까지 두루두루 배려와 예의를 차리면서 좌중을 휘어잡고 주도했다. 거침없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무엇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여유로움이 돋보였다. (…) 그는 회담을 앞두고 특사로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국정원 원장에게 특별 주문을 했다.
“김 위원장을 만나거든 인물 연구를 해 오세요.”
임 원장의 보고는 놀라웠다. 국제 정세에 밝고 영특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주입된 ‘망나니’와는 판이한 인물평이었다.
― (335~6쪽)에서
힐러리와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그가 퍼스트레이디로 끝날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다. 능력 있는 여성의 야망은 격려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매우 유능하고 매력적인 여성이다. (…) 전문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영부인이 된 힐러리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는 클린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과 젊음을 겸비한 여성이다.
― <‘노벨 평화상’을 받다>(350쪽), <엘리너에서 로라까지>(370쪽)에서
*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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