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일대기>현대 정치사를 관통한 영욕의 정치역정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했던 정치역정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다. 그의 정치인생은 분단국가의 아픔과 극복과정이었고, 개발독재에서 민주화로 전환되는 시대의 중심이었다. 개인ㆍ지역ㆍ계층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하지만, DJ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역사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또 DJ의 인생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발전으로 압축되는 디제이즘(DJism)이 되어 지금도 정통야당의 명맥을 잇고 있는 민주당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DJ는 보수세력에겐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진보진영에서는 행동하는 양심, 민주화ㆍ평화통일의 상징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유신시대, 광주민주화운동과 전두환 군사정권, 87년 6월 민주항쟁, 노태우ㆍ김영삼 정권, IMF 외환위기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의 서거에 이르는 영욕의 현대사 속에서 DJ의 정치역정 역시 좌절과 영광의 연속이었다.
▶개발독재와 군사정권에 대항한 DJ, 그리고 지역주의
=DJ가 한국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이 단행된 1970년 9월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면서부터다.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DJ는 박정희정권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에 맞서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등 과감한 공약으로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95만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때부터 DJ는 사실상 '박정희'의 최대 정적(政敵)이 됐고, 박정희 정권과의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했다. 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저질러진 '김대중 납치사건'은 전세계적인 인권문제로 비화될 정도였다. 그 후 DJ는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복되는 가택연금과 구속 등으로 시련을 겪으며, 이른바 재야운동의 중심에 섰다.
79년 10ㆍ26 사태로 전두환ㆍ노태우 등 신군부가 등장한 이후에도 DJ의 시련은 계속됐다. 5ㆍ18 광주민주화 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DJ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감형된 뒤 82년에 미국 망명 길에 올랐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과 인권탄압, 신군부 정권에 의해 자행된 광주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의 고질적 폐해 중 하나인 '지역주의' 또는 '영남패권주의'가 등장한 것은 DJ에 대한 긍정 또는 부정적인 평가와 함께 한국 현대 정치사의 끊이지 않는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호남은 타 지역으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 감정을 갖게 됐다. 또 그 감정은 고스란히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게 투영됐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ㆍ집권
=87년 민주화운동 전후로 DJ는 야당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해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제1야당으로 만든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전개해 87년 6ㆍ29 선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에 나섰으나 패배의 쓴맛을 봤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은 DJ에게 다시 한번 위기이자 기회를 안겼다.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에 대항해 1991년 4월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준비위원회와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합당, 김영삼 김종필이 빠진 야권에서 유일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후 DJ는 선거패배와 정계은퇴, 신당 창당을 거듭하다가 97년 대선에서 승리 제15대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DJ는 호남기반의 야당 지도자가 갖는 한계와 싸웠지만 국민들 눈에는 '분열의 상징'처럼 비치기도 했다. 제왕적 총재, 계파정치의 모든 폐해가 드러난 것도 이 때였다. 동교동계라는 말도, 영호남인들의 'DJ컴플렉스'라는 말도 DJ를 나타내는 전형이 돼 있었다.
▶집권 5년의 영욕
=97년 대선에서 DJ의 당선은 비록 DJP(김대중ㆍ김종필)연대라는 지역적 결합에 힘 입은 것이었지만 여야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집권 5년 동안 DJ는 IMF 외환위기 조기극복, 남북 첫 정삼회담을 통한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이룩했다. 금강산 육로관광의 길이 열리면서 남북 분단 55년의 벽도 허물었다. 한반도 긴장 완화는 월드컵대회와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의 밑거름이 됐다. 또 정보통신(IT) 산업 기반정착, 국민기초생활법 제정을 통한 생산적 복지확대 등도 DJ의 큰 업적으로 기록됐다. DJ는 또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국위를 선양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 확대, 노동조건 악화로 등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국민적 동의 없이 대북 송금을 추진해 대북관계에서 거둔 중요한 업적의 빛이 바래기도 했다. 집권 말에는 아들인 홍업?홍걸씨의 비리 연루 파문, 동교동계 2인자인 권노갑씨 구속 파문 등 각종 게이트 파문이 임기 내내 이어져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김대통령은 몇 차례 국민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특정 지역 인사 편중 논란도 그치지 않았다. 태생적 한계를 지닌 DJP 공조로 인한 국정 운영의 혼선에 이어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의 국회 통과로 DJP 연대가 붕괴되면서 우왕좌왕했던 점도 민심이반을 부추겼다.
▶끝이 없었던 '행동하는 양심'=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DJ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다시 정치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내 몸의 반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이라는 말에 노무현 정권 시기 열린우리당계와 민주계로 갈라졌던 민주개혁 세력이 감정적인 화해를 하기 시작했고, 이명박 대통령을 행해서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보수세력 입장에서는 노욕의 부활이라고 욕을 얻어먹었지만, 진보진영에서는 "DJ가 오죽하면 그러겠냐"며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안겼다.
김대중 평전을 쓴 어느 인사는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이 사망했을 때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민족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헌사한 것을 인용하며 "DJ만큼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도 없다"고 평가했다.
신창훈 기자/chunsim@heraldm.com
DJ는 보수세력에겐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진보진영에서는 행동하는 양심, 민주화ㆍ평화통일의 상징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유신시대, 광주민주화운동과 전두환 군사정권, 87년 6월 민주항쟁, 노태우ㆍ김영삼 정권, IMF 외환위기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의 서거에 이르는 영욕의 현대사 속에서 DJ의 정치역정 역시 좌절과 영광의 연속이었다.
▶개발독재와 군사정권에 대항한 DJ, 그리고 지역주의
=DJ가 한국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이 단행된 1970년 9월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면서부터다.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DJ는 박정희정권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에 맞서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등 과감한 공약으로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95만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때부터 DJ는 사실상 '박정희'의 최대 정적(政敵)이 됐고, 박정희 정권과의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했다. 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저질러진 '김대중 납치사건'은 전세계적인 인권문제로 비화될 정도였다. 그 후 DJ는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복되는 가택연금과 구속 등으로 시련을 겪으며, 이른바 재야운동의 중심에 섰다.
79년 10ㆍ26 사태로 전두환ㆍ노태우 등 신군부가 등장한 이후에도 DJ의 시련은 계속됐다. 5ㆍ18 광주민주화 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DJ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감형된 뒤 82년에 미국 망명 길에 올랐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했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ㆍ집권
=87년 민주화운동 전후로 DJ는 야당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해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제1야당으로 만든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전개해 87년 6ㆍ29 선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에 나섰으나 패배의 쓴맛을 봤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집권 5년의 영욕
=97년 대선에서 DJ의 당선은 비록 DJP(김대중ㆍ김종필)연대라는 지역적 결합에 힘 입은 것이었지만 여야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집권 5년 동안 DJ는 IMF 외환위기 조기극복, 남북 첫 정삼회담을 통한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이룩했다. 금강산 육로관광의 길이 열리면서 남북 분단 55년의 벽도 허물었다. 한반도 긴장 완화는 월드컵대회와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의 밑거름이 됐다. 또 정보통신(IT) 산업 기반정착, 국민기초생활법 제정을 통한 생산적 복지확대 등도 DJ의 큰 업적으로 기록됐다. DJ는 또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국위를 선양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 확대, 노동조건 악화로 등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국민적 동의 없이 대북 송금을 추진해 대북관계에서 거둔 중요한 업적의 빛이 바래기도 했다. 집권 말에는 아들인 홍업?홍걸씨의 비리 연루 파문, 동교동계 2인자인 권노갑씨 구속 파문 등 각종 게이트 파문이 임기 내내 이어져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김대통령은 몇 차례 국민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특정 지역 인사 편중 논란도 그치지 않았다. 태생적 한계를 지닌 DJP 공조로 인한 국정 운영의 혼선에 이어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의 국회 통과로 DJP 연대가 붕괴되면서 우왕좌왕했던 점도 민심이반을 부추겼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DJ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다시 정치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내 몸의 반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이라는 말에 노무현 정권 시기 열린우리당계와 민주계로 갈라졌던 민주개혁 세력이 감정적인 화해를 하기 시작했고, 이명박 대통령을 행해서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보수세력 입장에서는 노욕의 부활이라고 욕을 얻어먹었지만, 진보진영에서는 "DJ가 오죽하면 그러겠냐"며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안겼다.
김대중 평전을 쓴 어느 인사는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이 사망했을 때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민족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헌사한 것을 인용하며 "DJ만큼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도 없다"고 평가했다.
신창훈 기자/chunsim@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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