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기서 창 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시선이 되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주변 환경을 물끄러미 조망하게 된다. 멀리 63빌딩과 한강, 한강 다리, 남산타워 등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감 시점(bird's eye view)은 서민들의 유쾌한 생활상을 즐겨 그렸던 16세기 플랑드르의 풍속화가 브뤼겔의 화풍과 유사하다.
한편 차창 가까이로는 고철 기계처럼 육중한 외관의 공장 건물이 위압을 과시하고, 색색의 기와지붕이 차곡차곡 올려진 서민 주택가는 마치 거대한 쓰레기 더미처럼 위태위태하고 곧 무너져내릴 것 같은 불안감마저 조성한다. 그리고 조그만 여백 하나 없는 폐쇄공포증적 캔버스는 비어있는 공간에 대한 공포(horror vacuii)를 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간이 되는 힘은 인간적 따뜻함이다. 그것은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굽이굽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세상이다. 지하철 터널처럼 좁고 어두운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는 세상에는 희망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우리네 이웃의 긍정적 힘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풍속화가 최호철은 회화를 전공한 화가이면서 순수회화 뿐만 아니라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현대 시각문화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8년에는 [을지로 순환선]이라는 이 그림과 동명의 작품집을 발간하였으며 [괜찮아], [태일이], [모두가 내 딸이고 아들이야], [아틀리에 탐험기] 등 다수의 어린이 그림책에서 삽화를 그려 출판한 바 있다. 이처럼 대중매체와 순수미술의 경계를 구분짓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그는 스스로 ‘시각 이미지 생산자’이길 자처하며, 이웃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펼치는 이야기꾼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