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추억66 2009. 7. 11. 10:28

최호철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은 신도림 역으로 진입하고 있는 전철 안의 모습과 바깥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최호철은 민중가수 정태춘의 노래 [1992년 서울 종로에서]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실제로 지하철을 타고 봉천동 달동네를 다녀오는 길에 작품구상을 했다고 한다. 가로 216cm의 거대한 화면 안에는 저마다의 생각과 일상에 잠겨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가득 담겨있다.

 

지하철 안에는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전도에 목소리를 높이는 아저씨, 시장 바구니를 품에 안은 아줌마와 그의 딸,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학생,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보는 노신사, 갓난아이의 재롱을 지켜보는 젊은 부부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밖에도 지하철 안의 어수선한 소란스러움, 숨소리, 땀냄새, 지친 기색으로 무심하게 엇갈리는 시선들이 뒤엉켜 사람사는 세상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들을 얽어매고 있는 관계의 끈들도 보기 좋게 그려 낼 수 있는 낙서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창 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시선이 되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주변 환경을 물끄러미 조망하게 된다. 멀리 63빌딩과 한강, 한강 다리, 남산타워 등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감 시점(bird's eye view)은 서민들의 유쾌한 생활상을 즐겨 그렸던 16세기 플랑드르의 풍속화가 브뤼겔의 화풍과 유사하다.

 

한편 차창 가까이로는 고철 기계처럼 육중한 외관의 공장 건물이 위압을 과시하고, 색색의 기와지붕이 차곡차곡 올려진 서민 주택가는 마치 거대한 쓰레기 더미처럼 위태위태하고 곧 무너져내릴 것 같은 불안감마저 조성한다. 그리고 조그만 여백 하나 없는 폐쇄공포증적 캔버스는 비어있는 공간에 대한 공포(horror vacuii)를 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간이 되는 힘은 인간적 따뜻함이다. 그것은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굽이굽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세상이다. 지하철 터널처럼 좁고 어두운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는 세상에는 희망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우리네 이웃의 긍정적 힘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풍속화가 최호철은 회화를 전공한 화가이면서 순수회화 뿐만 아니라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현대 시각문화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8년에는 [을지로 순환선]이라는 이 그림과 동명의 작품집을 발간하였으며 [괜찮아], [태일이], [모두가 내 딸이고 아들이야], [아틀리에 탐험기] 등 다수의 어린이 그림책에서 삽화를 그려 출판한 바 있다. 이처럼 대중매체와 순수미술의 경계를 구분짓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그는 스스로 ‘시각 이미지 생산자’이길 자처하며, 이웃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펼치는 이야기꾼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최호철  (1965.12.10 ~   )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1년 애니메이션 [해돌이와 달순이], 1996년에는 영화 [꽃잎]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단편만화 [자전거 나들이]로 신한 새싹만화상 대상(1995)을 수상, 1996년엔 잡지 [이매진]에 [식모촌 여배우 실종사건]을 발표했다. [와우산], [을지로 순환선]과 같은 대규모 작품 속에 이웃들의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Artinculture

 

'갤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미술 쉽게 보기  (0) 2009.08.05
클로드 모네  (0) 2009.08.04
할아버지와손자 / 박수근  (0) 2009.07.11
Jack Vettriano  (0) 2008.08.14
Jack Vettriano  (0) 2008.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