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해지자

독감·천연두·홍역·소아마비… 인류 위협하는 ‘천의 얼굴’

추억66 2009. 5. 24. 13:41
독감·천연두·홍역·소아마비… 인류 위협하는 ‘천의 얼굴’
4,000여 종 중 100여 종 사람의 병 유발… 끝없는 변종 진화로 백신 무력화
핫이슈│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바이러스의 세계
 
글■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돼지인플루엔자(SI), 아니 ‘인플루엔자 A형(H1N1)’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4월13일 멕시코에서 발견된 ‘인플루엔자 A형’은 수많은 감염자를 내면서 북미·유럽 등 전 세계로 확산 중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세계보건기구(WHO)는 이 질병이 세계적 유행병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고, 미국은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질병의 확산 차단에 발벗고 나섰다. 왜 툭하면 바이러스 질병이 나타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일까?

인플루엔자 A형 감염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쓴 멕시코시티 시민들이 과달루페 대성당에서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을 간절히 올려다보고 있다.

바이러스는 라틴어로 ‘독(毒·virus)’을 뜻한다. 바이러스는 1892년 러시아의 생물학자 이바노프스키가 담배모자이크병을 연구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크기가 일반 세균의 100분의 1 정도인 10~300나노미터(㎚=10억 분의 1m)에 불과해 눈으로 바이러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세균여과기에 걸러지지 않아 일단 곰팡이나 박테리아 같은 병원균의 일종으로만 생각했다. 바이러스는 크기가 매우 작아 전자현미경으로만 관찰된다.

박테리아를 축구장에 비교하면 바이러스는 축구장에 있는 축구공 크기다. 너무 작아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던 바이러스는 그래서 한동안 ‘여과성 병원체’라고 불렸다. 바이러스의 모습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미국 과학자 웬들 스탠리다. 1935년, 그는 담배잎에 모자이크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병원체를 추출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병원체를 순수한 형태로 뽑아보니 생물체라기보다 단백질과 같은 단순한 고분자 물질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순수한 상태로 정제한 후 특수한 조건에서 농축해 결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생물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1938년에는 독일의 물리학자 루스카가 전자현미경으로 베일에 가려졌던 바이러스의 모습을 정확히 드러냈다. 바이러스의 내용물은 간단하다. 자신의 유전정보를 담은 핵산(DNA나 RNA)과 단백질 껍질로 구성될 뿐이다.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거나 물질의 대사를 위한 어떤 도구도 없다.

영양을 섭취하지도, 이산화탄소나 노폐물을 배출하지도 않는다. 신진대사를 하지 않아 무생물처럼 보인다. 하다못해 곰팡이나 기생충도 일반 세포처럼 핵막으로 둘러싸인 핵과 여러 소기관을 가진 진핵생물에 속하고, 핵막이 없고 소기관이 다소 부족한 세균(박테리아) 또한 엄연히 원핵생물일진대, 유독 바이러스만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이상한 범주에 속하는 기묘한 존재인 것이다.

변신 심한 독감 바이러스 A형

그렇다면 바이러스를 생물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자신이 기생할 세포를 찾아 들어가 자신과 같은 바이러스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때 바이러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구를 사용해 증식하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얌체처럼 침투해 들어간 세포의 여러 도구를 활용해 자신을 복제하고 증식한다.

그 증식하는 행위만큼은 생물의 기능이다. 문제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이 하찮아 보이는 바이러스가 감기에서 에이즈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괴롭히는 지독한 병원체라는 점이다. 어떤 세포냐에 상관없이 정상적인 세포만 있으면 무단침입해 자신을 무수히 증식한 후, 증식한 수많은 바이러스가 그 세포를 뚫고 나오니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세포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바이러스는 모든 생물계의 골칫거리인 셈이다. 다른 생물들에 얼마나 ‘독’(毒)이 됐으면 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었겠는가? 독감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는 특정 병원체에 의해 발병한다. 사람이 독감에 걸리듯 돼지도 독감에 걸리는데, 미국과 멕시코에서 유행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형은 A형이다.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가장 독하고 폭발적으로 유행하며, 원래는 다른 종(種)의 생물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종인 사람에게 전염되는 이유는, 돼지 몸 안에서 인간·조류·돼지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섞여 변이를 일으킨 혼합 변종이기 때문이다. 돼지는 특이하게도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사람독감 바이러스의 수용체를 모두 갖고 있어 두 바이러스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

돼지 몸에 조류와 사람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함께 들어가 유전자가 서로 혼합되면 변종 바이러스가 만들어진다. 즉, 두 바이러스의 RNA가 돼지의 몸 안에서 섞여 새로운 조합의 RNA를 가진 바이러스를 만들어낸다. 양 손에 카드 한 묶음씩을 들고 섞어 새로운 배열의 카드 묶음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형은 유전자가 막대기형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고 8개의 토막형으로 돼 있다. 그 또한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높게 한다.

큰 기둥이 섞이기는 힘들어도 토막 나면 섞이기 쉽게 마련이다. 돼지인플루엔자는 호흡기질환이다. 따라서 돼지고기나 돼지 육가공품을 먹었다고 해서 돼지인플루엔자에 감염되지는 않는다. 돼지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71도 이상의 온도에서 가열하면 죽기 때문에 익힌 돼지고기는 100%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변종으로 진화하며 백신 무력화

그런데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4월30일, 돼지인플루엔자(SI)가 사실상 돼지와 관련 없음이 역학조사 결과 밝혀졌다면서 ‘SI(Swine Influenza)’라는 명칭을 ‘인플루엔자 A형(H1N1)’으로 바꿨다. 지금까지 누구도 돼지로부터 감염됐다는 증거가 없다면서 “이번 바이러스는 인간을 통해 인간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로 보인다”고 이름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처음부터 용어 사용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터여서 이 부분은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또 WHO는 ‘인플루엔자 A형’ 전염병 경보 수준과 관련해 “6단계(대유행)로 격상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5단계 경보는 바이러스의 인간 대 인간 전염이 한 대륙 2개 나라 이상에서 발생한 상황에서 내려지는 것이며, 6단계 대유행은 대륙을 넘나들며 동시다발적으로 감염자를 양산하는 초강력 인플루엔자의 발생을 말한다.

현재 ‘인플루엔자 A형’은 5단계로 높여진 상태여서 6단계인 대유행으로의 확산 가능성에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독감 바이러스는 A·B·C 세 종류가 있다. 이 중 유행성 독감을 일으키는 항원은 A형과 B형이며, C형은 사람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B형의 경우 유전자 염기서열의 한두 군데만 달라지는 ‘소(小)변이’를 일으킨다.

시드니독감·파나마독감·캘리포니아독감 등 해마다 일시적으로 겪는 대부분의 독감이 바로 바이러스 B형의 소변이 때문이다. 유전자의 많은 부분이 바뀌는 대(大)변이를 일으키는 것은 바이러스 A형이다. B형이나 C형은 한 종류인데, A형만 자꾸 변신하기 때문이다. 스페인독감·홍콩독감·아시아독감이 모두 A형이다.

유전정보를 지닌 핵산과 단백질 껍질뿐인 바이러스에는 자신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효소가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무기는 사람 같은 숙주(宿主)세포 안으로 뚫고 들어가 증식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 때문에 바이러스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감염시키며 성공적으로 살아남는다.

이처럼 바이러스는 혼자서는 어떤 증식활동도 하지 못한다. 생물의 세포 내에서 생존하며 기생생활을 한다. 숙주가 없는 바이러스는 무생물에 가깝지만 숙주세포만 있으면 생물의 흉내를 낸다. 동물(광견병 등)·식물(담배모자이크병 등)·사람(천연두·간염·에이즈 등)·곤충(누에병) 등 세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침입한다.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정보는 대부분 RNA가 전달한다. RNA는 DNA보다 불안정해 돌연변이가 좀더 쉽게 일어난다. DNA보다 실수 빈도가 100배 이상 높다. 바이러스의 겉은 헤마글루티닌(H)과 뉴라미다제(N)라는 단백질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헤마글루티닌은 15가지(H1~H15), 뉴라미다제는 9가지(N1~N9). 바이러스의 변형력은 이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나다제 같은 항원 단백질 분자의 성질에 기인한다.

즉,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다제의 조합으로 총 135가지의 변종 바이러스가 만들어져 독감의 유형이 결정되는 것이다. 바이러스 A는 아형(亞形)에 따라 H3N2·H1N1·H5N1·H2N2 등으로 나뉜다. 인간에게서는 헤마글루티닌 3가지(H1·H2·H3), 뉴라미다제 2가지(N1·N2)만 발견된 상태다. 따라서 총 135가지 바이러스 유형 중 인체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H1N1·H1N2·H2N1·H2N2·H3N1·H3N2의 6가지뿐이다.

때문에 이들을 제외한 다른 유형의 신종 바이러스가 인체를 공격할 경우 면역력이 갖춰지지 않아 물리치기 힘들다.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 Avian Influenza)로 환자의 3분의 1이 사망할 만큼 치명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인체가 겪어보지 않아 면역력이 없는 H5N1이라는 신종 AI 바이러스였기 때문이다.

AI는 같은 종인 새끼리는 공기를 통해 쉽게 감염되지만 다른 종인 사람에게는 전파가 어려운 질병이다. 하지만 AI에 감염된 환자들은 모두 닭이나 오리를 직접 취급하다 바이러스가 ‘조류→인간’으로 전파된 경우로 이종 간 전파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지금 시끄럽게 문제되고 있는 돼지에서는 H1과 H3, N1과 N2가 조합돼 만들어진 H1N1·H1N2·H3N2형의 바이러스가 주로 발견됐다.

5억 명 이상 희생자 낸 천연두

바이러스는 가장 작고 단순한 생명체이면서도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바이러스가 무서운 점은 이처럼 자신의 유전자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정체를 아리송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새로운 숙주에 침투할 때마다 변종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그들은 왜 이토록 변종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독감 바이러스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다.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의 유전자가 바뀌면 숙주 안에서 생겨난 항체의 공격을 피할 수 있고, 백신의 효과도 무력화할 수 있다. 또한 감염시킬 숙주세포의 종류 자체를 바꿀 수도 있게 되므로 환경의 변화에 쉽게 대처해 자신을 증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돌연변이는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단일성이나 획일화는 위험하다. 변화한 환경에서 전멸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순종보다 잡종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이러스는 인류 역사 내내 출현해 엄청난 생명을 앗아갔다. 인류의 역사는 ‘바이러스와 투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러스 중에서도 인류에게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바이러스는 아마도 천연두일 것이다.

역사상 천연두(두창·마마라고도 불림)의 존재가 분명히 확인된 것은 기원전 1160년. 당시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5세의 미라에서 얼굴과 목·어깨 등에 곰보자국이 확인되면서 천연두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났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1520년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신세계’ 원주민에게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콜럼버스와 함께 신대륙으로 건너가 원주민의 95%를 몰살시켰다. 인류 역사상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5억 명 이상이 이 질병에 의해 희생됐다고 추정될 정도로 끔찍한 바이러스로 맹위를 떨쳤다. 오죽했으면 정복자들이 “신이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땅을 청소해 주셨다”고 했을까?

그토록 무서운 천연두는 1798년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종두’라는 백신을 보급하면서 급격히 몰락해 1977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환자가 보고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바이러스를 물리친 거의 유일한 예다. 폴리오(Polio·척수성 소아마비) 바이러스도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들이 남긴 상형문자 기록을 보면 소아마비 환자가 보고돼 있다. 사람들은 이 병의 원인을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지내다 19세기에 이르러 원인을 밝혀냈다. 1916년 소아마비가 전 세계에 크게 창궐했을 때는 바이러스 저항성이 전무한 어린이 6,000여 명이 사망하고, 3만 명 이상의 아이가 소아마비에 걸려 불구의 몸이 됐다.

일본에서는 1960년 한 해 동안 5,606명이나 되는 폴리오 환자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환자는 5세 미만의 어린이였지만, 저항성이 없는 어른도 희생양이 됐다.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은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황금기를 구가하던 아테네를 몰락시킨 것은 스파르타가 아니라 아테네 시민을 죽음으로 내몬 홍역이었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인간의 세포를 공격하는 과정이 담긴 X-ray 사진.

스파르타의 침공으로 수많은 촌락민이 아테네로 몰려들었고, 덥고 숨막히는 오두막에서 북적대던 아테네인들 사이에 역병이 돌아 5년간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줄었다.

일본의 세균의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의 목숨을 앗아간 황열병도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이다. 모기를 매개로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에서 끊임없이 유행하는 황열병은 1905년 미국을 공포에 빠뜨리며 1,000여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이 질병은 보통 감염자의 5% 정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백신이 개발되면서 위험은 줄어든 상황이지만, 1994년 남미에서만 20여 만 명을 사망하게 한 치사율 높은 질병으로 되돌아왔다. 바이러스가 반 세기 만에 다시 만연한 것이다.

1918년에는 스페인독감(H1N1)이라는 이름의 인플루엔자가 세계를 강타했다. 스페인에서 발생한 독감은 선원들에 의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3억 명 이상이 감염돼 무려 2,00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지독한 재앙이 발생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사망자인 1,500만 명보다 많은 수치다. 강력한 전파력을 지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계속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끊임없이 인류를 위협한다. 독감으로 인한 재앙은 쉼 없이 반복됐다.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57년의 아시아독감(H2N2), 80만 명이 사망한 1968년의 홍콩독감(H3N2), 그리고 1977년 러시아독감(H1N1)까지….

10년마다 새로운 독감이 발병한다고 해서 ‘10년 주기설’까지 나돌고 있다. 1977년 러시아독감 이후 독감 바이러스로 인한 엄청난 희생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언제 또다시 인류를 위협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이러스의 공포

1976년 6월 수단에서는 ‘에볼라 출혈열’로 284명이 감염돼 151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년 만인 1995년 콩고에서 다시 발생해 244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때까지도 에볼라 바이러스의 존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감염 후 1주일 이내에 90%의 치사율을 보여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기록됐다.

1996년에는 가봉에서, 2004년에는 콩고에서 또다시 출현해 지금까지 사하라 사막 이남을 중심으로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서 10여 차례 유행하면서 수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아직까지 난공불락, 정확한 기원도 오리무중이다. 1980년대 초 현대의 흑사병이라고 불리는 에이즈가 등장해 한동안 잠잠했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인체 면역을 담당하는 T림프구에 직접 침투해 생명을 앗아가는 에이즈 바이러스는 현재 4,000여 만 명의 감염자를 낳고 2,000여 만 명 정도가 사망한 지구촌 최대 역병이 됐다. 매년 전체 유전자의 1%씩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탁월한 ‘변신술’로 항체나 예방백신을 개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1986년 영국에서 감염된 소가 처음 발견되면서 존재를 드러낸 광우병. 1997년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광우병의 정확한 명칭은 우해면양뇌증(BSE)으로 뇌가 스펀지처럼 돼 죽는 병이다. 이 BSE가 사람에게도 전염돼 ‘인간 광우병’으로 불리는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코프병(vCJD)’을 유발했다.

2003년 12월 전 세계적으로 153명의 환자가 보고됐다. 그 전염성이 너무 커 광우병이 발병하면 심지어 전국의 모든 소를 소각하기도 한다. 2006년 1월에는 캐나다에서 또다시 광우병에 감염된 소가 발견돼 관련국들을 긴장시켰다. 1993년 미국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에서는 치사율이 50%에 이르는 한타 바이러스 폐증후군이 최초로 발생해 미국 전역과 남미 지역까지 급속도로 확산됐다.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336명의 환자가 발생해 200명 가까이 사망했다. 1997년 10월 말레이시아에서는 ‘발열과 두통에 이어 행동 이상이 나타나고 혼미 상태에 빠진다’는 질병을 일으키는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했다. 일명 니파 바이러스. 1998년과 1999년에 걸쳐 257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100명이 사망했다.

식육용 돼지에서 사람에게 감염되는 것이 알려져 숱한 돼지가 도살됐다. 최근 5년 사이에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에 이어 조류인플루엔자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바이러스 전염병이 기승을 부렸다. 2003년 11월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발생한 사스는 범세계적으로 확산해 30여 국에서 8,000여 명의 환자를 감염시켰다.

감염 속도가 빠른 사스는 몇 달째 수백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며 전 세계를 휩쓸었다. 발생지인 중국에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기승을 부려 대만, 곧이어 필리핀이 새로운 감염지역으로 추가 발표되고 캐나다에서도 환자가 나타났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 규명도 안 된 실정이다.

세계가 신종 폐렴인 사스의 공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시점에 AI가 발생해 천문학적 피해를 유발했다. AI는 사실 지난 세기 네 차례나 범세계적으로 유행한 질병이다. 최근 신종 바이러스(H5N1)로 둔갑해 다시 출현한 것이다. 사람에게 전염돼 1997년 홍콩에서 18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베트남에서는 12명이 숨졌다.

이탈리아·그리스·불가리아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고 지금도 아시아 지역에서는 산발적으로 발병한다. ‘양치기 소년처럼 공포를 자꾸 확산시킨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AI 바이러스의 전염력은 갈수록 세져 재앙이 정말 임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세계 곳곳에서 불길한 징조가 포착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을 공격해온 바이러스는 그 종류가 수없이 많고 아직 인류라는 집단과 만나지 못한 것도 많다. 이들은 언제든 치명적 바이러스로 변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다. 미래란 현재의 연장일 뿐이다. 21세기라고 해서 ‘바이러스와 전쟁’에서 급격한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일 뿐이다.

치료제 개발 어려워…

지구상에는 4,000종 이상의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그 중 100여 종이 사람의 몸에 병을 유발한다. 바이러스가 인체를 공격하는 ‘무기’는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다제다. 호흡을 통해 바이러스가 체내로 침투하면 헤마글루티닌이 호흡기 점막세포에 달라붙는다. 점막세포로 들어가 증식한 바이러스는 점액질에 싸여 뭉친 형태로 세포를 깨고 나온다.

이때 뉴라미다제가 바이러스를 흩어지게 해 다른 점막세포를 공격할 수 있게 돕는다. 따라서 독감 바이러스의 치료제는 뉴라미다제의 기능을 저해해 바이러스가 증식하지 못하고 죽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체는 이물질이 몸에 침투하면 항체를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항체는 이물질에 반응해 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몸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보유한 항체가 없으면 외부에서 주입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죽음에 이른다. 사람의 면역체계가 이물질을 인식해 바이러스와 싸울 때 독감 바이러스는 이에 맞서 표면구조를 끊임없이 바꿔 나간다. 해마다 독감 백신이 바뀌는 것도 이 같은 변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치료제를 개발했다 싶으면 바이러스는 재빠르게 새로운 형태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나간다.

더구나 숙주세포에 침입한 뒤 그곳의 여러 도구를 이용해 자신을 복제하고 증식하므로 인체의 세포에는 해를 주지 않고 바이러스만 선택적으로 죽이는 치료제를 개발하기란 어렵다. 지금까지 등장한 항바이러스제는 모두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할 뿐 잠복한 바이러스를 직접 죽이지는 못한다.

가장 오래된 바이러스 중 하나인 감기 치료제 개발 역시 이런 이유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듯, 돌연변이에 능한 천의 얼굴을 가진 바이러스의 생명력은 정말 대단하다. 영하 수십 도에서도 미래의 번식을 기약하며 긴 잠을 잔다.

냉동보관한 두창(천연두) 바이러스는 30년 뒤 해동했을 때 쉽게 살아났고, 1918년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는 70년간 알래스카의 동토에 묻혔던 사체의 폐 조직에 붙어 생존했다. 사스 바이러스는 인간의 대변에서 2일, 소변에서 1일, 플라스틱 위에서 2일 이상 생존할 수 있고, 기댈 숙주 없이 공기 중에 붕붕 떠다녀도 1~2시간은 거뜬히 살 수 있다.

사람들은 세균과 바이러스를 많이 혼동한다. 물론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사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세균은 몸집도 바이러스보다 크고 핵을 가지고 있어 숙주 없이 생존과 번식이 가능하다. 또한 항생제가 어느 정도 무력화할 수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항생제가 전혀 듣지 않는다.

인간이 바이러스를 상대하기 힘든 이유다. 에이즈로부터 간염·독감 등에 이르기까지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전염병은 수백 종에 이르지만 지금까지 개발된 치료제는 전무한 상태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892년 담배모자이크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뒤부터 1938년 루스카의 전자현미경에 의해 베일에 가려졌던 바이러스의 모습이 처음으로 벗겨지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그러나 세기가 바뀐다고 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종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에 걱정해야 할 바이러스는 과거에 경험했고 지금도 되살아나는 기존 질환의 유행(re-emerging)이거나, 과거에 만난 적이 없는 새로 생겨난 질병의 유행(emerging)이다.

바이러스의 영원한 ‘짱’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17~18세기 무렵 탄생했지만 돌연변이가 주특기여서 아직도 잡히지 않은 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당분간 인플루엔자를 누를 수 있는 바이러스는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밀고 밀리는 바이러스와 백신의 싸움

그럼에도 바이러스와 인간의 밀고 밀리는 전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연구자들은 세균은 항생제라는 ‘창’으로, 바이러스는 백신이라는 ‘방패’로 막아내고 있다. ‘백신(vaccine)’은 라틴어로 소(vacca)를 뜻하는데, 제너의 업적인 우두 접종법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백신은 일종의 ‘가짜’ 병균이다.

죽거나 기능이 약해진 병균이기 때문에 병균으로서의 자격은 미달인 셈이다. 하지만 이를 우리 몸에 접종하면 유익한 효과가 발생한다. 몸이 ‘가짜’ 병균을 ‘진짜’로 알고 방어체계를 가동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중에 ‘진짜’ 병균이 몸에 침투해도 이와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수호군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경우 예방 백신을 맞으면 60~90% 예방이 가능하다. 치료가 어렵다면 최선의 방책은 예방이다. 바이러스가 몸에 침입해도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면역 시스템을 인체에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천연두가 지구에서 퇴치된 것도 성공적인 예방접종의 결과다. 현재 예방접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는 바이러스 질환으로는 홍역·풍진·유행성이하선염·소아마비·일본뇌염·인플루엔자·B형간염·광견병 등이 있다.

머지 않은 시기에 소아마비도 근절될 것으로 기대된다. 바이러스는 점점 세계화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새롭게 등장하는 탓도 있지만, 사람들의 행태 변화 역시 주요 원인이다. 국제 무역과 여행이다. 과거에는 질병이 지역적으로 국한돼 소위 ‘질병의 쇄국주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인간 문명의 세계화는 곧 바이러스 집단의 세계화로 이어졌다. 세계여행의 자유화는 한 지역에서만 창궐하던 바이러스의 세계여행을 가능하게 해 ‘수입병’이라는 낯선 질병을 등장시켰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거리만큼만 질병이 퍼지다 다음에는 말이 뛸 수 있는 거리를 거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거리까지 나갔다.

이제는 비행기가 전염병을 옮기는 최악의 위험요인이다. 비행기는 여행자·사업가·군인·이민국관리·정치적난민들과 함께 병원체를 퍼뜨린다. 식량·원료 공급의 세계화 역시 각종 전염원의 세계적 유행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일으킨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동물의 질병이 어느 순간 인간에게 옮겨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신종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서는 개개 국가의 방역 시스템과 검역 시스템의 정비가 절실하다. 각국의 방역체계는 어느 정도 업그레이드되는 데 반해 불행하게도 검역체계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까다롭다는 미국조차 허점투성이다.

사스도 중국의 방역체계가 조기에 가동됐다면 그렇게 확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WHO는 베트남·캄보디아 등 저개발국의 방역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바이러스는 변신의 명수다. 돌연변이율의 속도가 다른 미생물에 비해 무려 100만 배나 빠르다. 동물에 기생하던 바이러스가 갑자기 변성하면서 종(種)의 경계를 뛰어넘어 사람으로 숙주를 바꾸는 경우가 가장 무섭다.

아프리카원숭이가 바이러스를 사람에게 옮겨 발병했다고 생각되는 에이즈가 대표적이다.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는 지금까지 2,500만 명이 넘는다. 바이러스는 그렇게 돌연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생물(숙주)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종족 번식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인류를 공격해도 바이러스에는 별 상관이 없다.

손을 쓰지 못해 답답한 것은 인간뿐이다. 어쩌면 인간이 바이러스를 극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신종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인간의 전략·전술도 계속 발전할 수밖에 없겠지만, 새로운 백신이 개발될 때마다 자신의 유전정보를 변화시켜 새로운 모양을 갖추어 또 출몰할 테니 말이다.

인간과 바이러스의 전쟁이 숙명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마도 미시세계에 사는 바이러스와 인간은 인류가 종말을 맞을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할 듯싶다.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대책은 치료제를 만들어내는 주기를 점점 짧아지게 하는 정도 아닐까? 그래도 어쩌랴, 단 한 명을 구하더라도 손을 놓을 수 없음은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춮처  : 월간 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