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정에 부는 바람은 사랑을 잊었다.
가을 산정에 부는 바람은 추억을 잊었다.
가을 산정에 부는 바람은 그리움을 잊었다.
사랑도 정염도 모두 잊어서 저 홀로 홀연하다.
바람은 다도해의 섬들을 지나 불어오기도 하고
대숲 우거진 남도의 고샅길을 지나 불어오기도 하고
내 마음속 황량한 묵정밭에서 불어오기도 하지만
가을 산정에 부는 바람은 풍우에 씻겨 빛나는
저 우뚝한 천관의 봉우리들처럼 무정하여 슬프다.
햇살과 바람과 붉은 노을의 빛깔들까지
흐느끼며 존재하는 가을 산정의 오후
거기, 가지 못한 길이 있다.
눈부신 억새꽃의 물결 속으로
가지 못한 길의 마음이 생생하여 아프다.
마음은 새털구름 흘러가는 하늘에 닿고
송두리째 흔들리고 싶은 자유로운 영혼들
무성했던 여름에서 겨울의 적막으로 가는 시간
가을산은 순정을 바쳐버린 여인의 가슴처럼
만상의 상념들로 가득하다.
떠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날들
그리움은 이제 갓 모가지를 빼고 흔들리는
저 은빛 억새꽃의 물결처럼 찬란한데
애오라지의 가냘픈 노래가 흐느끼고 있다.
연대봉 돌탑 위에 앉아서 바라보면
이미 잊혀진 시간이 되어버린 수많은 날들
가을 산정에는 머무를 수 없는 바람만이 흔들리고 있다.
사랑을 잊었다고 하지만
추억을 그리움을 잊었다고 하지만
가을 산정에는 꿈꿀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출렁이고 있다.
산에도 들에도 저무는 바다의 옷자락 위에도
오오 눈부시게 쓸쓸한 바람의 노래여
그 길의 상념 속에서 떠도는 나그네의 마음이여 ...
이형권의 <가을 산정에 부는 바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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