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TV이야기

중전 자리에 무심한 동이? 최숙빈은 달랐다

추억66 2010. 9. 13. 16:30

  
죽음이 임박한 인현왕후(왼쪽, 박하선 분).

인현왕후(박하선 분)가 35세의 나이로 이승을 떠나자, MBC 드라마 <동이>가 다시 분주해졌다. 누구를 차기 중전으로 세울 것인가를 두고 신경전이 가열되고 있는 것이다.

 

본시 야심이 큰 데다가 이미 한 차례 중전을 지낸 적 있는, 게다가 세자의 모후라는 결정적 강점을 갖고 있는 장 희빈(이소연 분)이 차기를 노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장 희빈 본인도 당연히 자신이 돼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에 비해, 동이 최 숙빈(한효주 분)은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수도자처럼 초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이의 최대 관심사는 오로지 아들의 안위뿐이다. 누가 중전이 되고 누가 차기 왕이 되든지 간에 그는 그저 아들 연잉군이 정쟁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살아 나갔으면 하고 기원할 따름이다.

 

숙종(지진희 분)이 동이를 후궁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빈(嬪)에 책봉한 것을 두고 동이의 중전 책봉을 위한 수순이 아닌가 하는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드라마 속 동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일편단심으로 아들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인현왕후 사망 이후의 실제 정황을 보노라면, 드라마 속의 동이와 실제의 최 숙빈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실제의 최 숙빈이 차기 중전을 노렸다고 추론할 만한 객관적 정황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최 숙빈 자신과 숙종의 행보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실제 최숙빈은 연잉군의 안위만 걱정했을까

 

  
MBC 드라마 <동이>.
ⓒ MBC
동이

 

최 숙빈이 차기를 염두에 두었다는 점은, 인현왕후 사망 1개월 뒤부터 그가 장 희빈 제거에 나섰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숙종 27년(1701) 9월 23일자 <숙종실록>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죽자 최 숙빈은 '왕후의 생전에 장 희빈이 주술적 방법으로 왕후를 저주했다'는 취지로 숙종에게 보고했다. 

 

사료상의 분위기를 보면, 이때 최 숙빈은 숙종에게 별다른 증거를 제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소문이 있다는 식의 수준에서 장 희빈의 비행을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보고는 결국 장 희빈 처형으로 연결되었다.

 

이 같은 최 숙빈의 행보는, 그의 평소 태도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소령원(昭寧園, 최숙빈의 무덤)에 있는 '숙빈 최씨 신도비'에 따르면, 최 숙빈은 매우 과묵하고 신중한 여인이었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간에 그는 남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시녀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과묵하고 신중한 사람이 인현왕후 사망 직후에 별다른 증거도 없이 장 희빈을 고발한 것을 보면, 그가 이 시기에 심리적으로 뭔가에 쫓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뭔가'란 바로 장 희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이다. '이대로 상황을 방치했다가는, 세자의 모후이자 전직 중전인 장 희빈이 중전 자리를 되찾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처럼 다급하고 신속하게 장 희빈 제거에 나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최 숙빈역시 중전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신이 중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 희빈이 중전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장 희빈이 사라지면 자기가 유력 후보가 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장 희빈을 제거하려 한 것은, 자신이 중전이 될 가능성에 대해 최소한 '미필적 고의' 정도는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필적 고의'란, 예컨대, '살인'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식한 상태에서 사람에게 '상해'를 가하는 경우에 범죄 행위자에게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형법상의 용어다.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식했다고 볼 만한 정황이 없으면 이 행위자는 그냥 상해죄의 처벌을 받고, 그런 의식상태가 있었다고 볼 만한 정황이 있으면 이 행위자는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 하여 살인죄의 처벌을 받게 된다.

 

최숙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 원천봉쇄한 숙종의 하교

 

  
장희빈의 사당인 대빈궁(大嬪宮)이 있었던 자리. 지금은 서울시 종로세무서가 들어서 있다. 대빈궁은 1870년에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자리로 옮겨졌다.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대빈궁

이처럼 최 숙빈이 최소한 '미필적 고의' 정도는 갖고 있었다는 점은 '최 숙빈을 잘 아는 한 남자'의 태도에서도 간접적으로 표출된다. 최 숙빈을 잘 아는 한 남자란 숙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 숙빈이 장 희빈의 비행을 보고한 지 보름 정도 지난 숙종 27년(1701) 10월 7일에 숙종이 발표한 하교에서 그 같은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10월 7일은 장 희빈이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장 희빈의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때였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도 장 희빈을 더 이상 견제할 필요가 없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 날, 숙종은 향후 관습법이 될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이제부터 나라의 법으로 삼노니, 빈어(嬪御, 후궁)가 왕비에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이 하교는, 중전과 후궁들이 뒤얽혀 유혈을 부른 지금의 사태가 다시는 재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와 반성의 메시지를 후대의 왕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것이 이 하교의 표면적 메시지다. 

 

그런데 이 하교는 누군가를 겨냥한 또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언뜻 보면, 다음날 죽게 될 장 희빈을 겨냥한 하교인 것처럼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장 희빈이 중전이 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마당에 굳이 그를 겨냥해 관습법 하나를 새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노련한 정치가인 숙종이 그처럼 무의미한 입법을 했을 리는 없다.

 

이 하교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는, 이 하교로 인해 가장 피해를 입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 하교 때문에 가장 피해를 입을 사람은 당연히 최 숙빈이었다. 인현왕후가 죽은 마당에 장 희빈까지 사라지면 최 숙빈이 가장 유력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 하교가 다름 아닌 최 숙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입법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만간 장 희빈이 죽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내심 고무되어 있었을 최 숙빈. 그는 하교를 듣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장 희빈, 꼴 좋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소름끼쳤을 것이다. 하교의 표적이 자신이라는 점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 숙빈의 중전 책봉을 가로막는 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이 최 숙빈의 심리상태를 간파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숙종은 최 숙빈이 중전 자리에 무심한 여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숙종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최 숙빈을 중전 자리에 앉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필 그 시점에 그런 하교를 발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9월 7일에 방영된 <동이> 제50회에서, 숙종이 동이를 정1품 빈에 책봉한 일을 두고 장 희빈 쪽의 관료인 장무열(가상의 인물)이 '임금이 최숙의(동이 지칭)를 중전 자리에 앉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고 해석했지만, 실제로 최 숙빈이 빈에 책봉된 시점은 인현왕후가 죽기 2년 전인 숙종 25년(1699)이었으므로 이 일은 차기 중전 자리에 대한 숙종의 의중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었다.

 

드라마 속 동이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야망은 있었네

 

  
인현왕후 사후에 숙종은 최숙빈을 궐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그를 중전으로 맞이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표시했다. 사진은 창덕궁의 모습.
ⓒ 창덕궁 홈페이지
창덕궁

숙종이 최 숙빈의 욕심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욕심을 실현시켜줄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취한 후속 조치에서 보다 더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숙종 27년(1701) 10월 이후의 어느 시점엔가 최 숙빈을 왕궁에서 내보내고, 숙종 28년(1702) 9월에 세 번째 정실부인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이는 한편 이 기회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

 

  
바느질을 담당한 침방나인의 모습. 사진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안에 있는 밀랍인형.
ⓒ 김종성
침방나인

숙종이 인원왕후와 최 숙빈을 같은 공간에 두지 않은 것은 최 숙빈이 새 중전의 내명부 지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한 행동인 동시에, 중전 자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 최 숙빈이 새로운 중전 밑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없을 것을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사료에 나타난 최 숙빈과 숙종의 행보를 보면, 실제의 최 숙빈은 드라마 속의 동이와 달리 인현왕후 사후에 중전 자리에 야망을 품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드라마 속의 동이는 "우리 아들만 무사할 수 있다면!"이라며 중전 자리에 무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실제의 최 숙빈은 '아들 인생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도 그에 못지않아!'라며 중전을 향한 행보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그처럼 불타는 자기애(自己愛)가 없었다면, 천민 출신의 고아로서 하급궁녀가 되어 궐내 '봉제공장'(침방)에서 '재봉틀'(바느질 담당)을 돌리던 그가 장 희빈과 싸우면서 그런 자리에까지 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