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가난의 끈 끊자` 다짐했던 그 바위서 `세상과 끈` 끊다

추억66 2009. 5. 24. 13:33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를 승부라고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런 정치관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승부사 노무현의 성적은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다. 국회의원 선거, 부산시장 선거 등에서 네 번이나 낙선을 할 정도였다. 영남 출신으로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삼는 선택을 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오뚝이 정치는 가장 큰 승부인 2002년 대선에서 감동적인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청문회 스타가 되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총선 때 부산 동구에 출마해 민정당 실세 허삼수 후보를 꺾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통일민주당의 공천을 받았다. 그를 YS와 연결했던 김광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재야 몫으로 남구를 제의받은 노무현이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를 역제의해 왔다”고 말했다.

그해 11월 열린 5공 비리 청문회는 그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계기였다. 생중계 시청률이 50%를 넘나들었던 이 청문회에서 그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정주영 현대 회장 등을 논리적이고 매서운 추궁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인 것은 새 사실을 밝혀서가 아니라 증인들의 기를 꺾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인 노무현의 이미지를 결정지은 것은 89년 12월 광주 청문회 때였다. 그는 증인으로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에서 자위권 발동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대목에서 자신의 명패를 집어던졌다. 청문회는 그 사건으로 끝나버렸다.

양 김과의 애증
90년 1월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YS,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했다. 그는 YS를 “변절자”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꼬마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김대중(DJ)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과의 야권 통합에 참여해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을 맡았지만 YS와 결별한 대가는 컸다. 허삼수 후보와 다시 맞붙은 92년 14대 총선에서 첫 고배를 마셨다. 4년 전 허씨를 “반란의 총잡이”이라고 했던 YS가 “충직한 군인”이라고 치켜세운 결과였다. 3년 뒤엔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또 낙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DJ와도 등을 졌다. 정계를 떠났던 DJ가 복귀하면서다. DJ가 15대 총선 직전인 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신당 창당은 민의의 왜곡이며 보스 중심의 줄서기란 전근대적 정치행태를 답습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잔류했다. 15대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나왔던 이명박 대통령과 맞붙었던 노 전 대통령은 “3김 청산”을 외쳤지만 양 김씨를 모두 등진 결과는 3등이었다. 연전연패를 겪으면서 대중 정치인으로서 그의 생명력은 끝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대통령에 대한 꿈을 품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97년 그가 김정길·이철 전 의원 등과 함께 ‘호구지책’ 차원에서 서울 강남에 ‘하로동선’이란 고깃집을 열었을 때다. 이강철 전 대통령 정무특보는 “DJ와 신한국당 후보가 대선에 나올 텐데 우리 국민통합추진위에선 당신(노무현)이 나가는 게 어떠냐고 권했더니 놀라면서도 ‘기분은 좋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97년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가 대선 후보로 나오자 노 전 대통령은 한때 “나도 할 수 있다”며 대권 도전 의지를 밝혔지만, 결국 야권 통합을 명분으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맡아 DJ 측에 재합류했다. 그는 DJ 밑에서 대권의 꿈을 구체적으로 키워 나갔다. 98년 모친의 삼우제를 지내기 위해 김해에 내려갔다가 고향 친구들이 “왜 호남당에 들어갔느냐”고 걱정하자 그는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영남당 되는 거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바보 노무현’
노 전 대통령은 98년 종로 재·보선에 집권당인 국민회의 후보로 나서 7년 만에 국회로 돌아왔다. 하지만 2년 뒤 종로를 버리고 2000년 총선 때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다. 지역주의 타파가 명분이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쓴 승부수였지만 또 빗나갔다. 네 번째 패배였다. 하지만 반전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3당 합당 거부, 부산 출마 등 무모해 보이는 ‘노무현 스타일’은 충성도 높은 매니어층을 형성한 것이다. ‘바보 노무현’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정치인 최초의 온라인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된 것도 이때다.

DJ는 낙선한 노 전 대통령에게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겼다. 노 전 대통령이 부산 출마 의지를 밝혔을 때 “노 의원, 나도 상고 나온 사람이야. 정치는 꿈을 갖고 도전하는 것이야”라고 격려했던 DJ였다.

드라마의 시작
2001년 9월 부산 지역 후원회에서 대선 도전 의사를 밝힌 뒤 10월 원외 최고위원에 당선된 그는 대권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그 경선 통과 가능성을 점친 사람은 적었다. 1997년 대선 때 500만 표를 얻었던 이인제 의원의 벽은 높아 보였다. 당의 주류였던 동교동계도 이 의원과 가까웠다.

하지만 국내 정치 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경선(2002년 3~4월)이 ‘노무현 주연’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는 이인제 의원의 신한국당 경선 불복 전력을 물고 늘어지고 본선 경쟁력에 의구심을 제기하면서 영남후보론을 내세웠다. 광주에서부터 ‘노무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노무현 바람’은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욕구와 맞물려 곧 태풍이 됐다. 출발점에선 이 의원 지지율이 두 배 이상 높았지만 경선의 승자는 노무현이었다.

하지만 경선 승리의 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YS를 찾아가 그에게서 받은 시계까지 보여주며 허리를 굽힌 게 화근이었다. 여기에 DJ 아들을 포함한 비리 게이트가 정국을 강타했다. 노 전 대통령을 간판으로 내세워 치른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은 민주당의 참패로 끝났다.

이 무렵 월드컵 붐을 타고 정몽준 의원이 대선 가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내의 반 노무현 세력은 후보 교체를 요구하며 그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들은 급기야 ‘후보단일화 협의회’를 결성해 줄지어 탈당했고, 이런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한 번 도박을 걸었다. 그는 후보직을 내걸고 “TV토론과 국민경선을 통해 단일화를 하자”고 정 의원 측에 제안했다. 단일화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지자 그는 “정몽준 의원의 뜻대로 여론조사로 단일 후보를 결정하자”고 선수를 쳤다. 여론조사 설문 형태를 둘러싸고 협상이 교착되자 ‘이회창 후보에 대한 경쟁력’을 묻자는 정 의원 측의 요구까지 수용했다. 그렇게 물으면 노 전 대통령보다 정 의원이 더 유리할 것이란 게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여론조사 승부에서 그는 정 의원을 누르고 여권의 단일 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단일화의 여세를 몰아 노 전 대통령은 마침내 앞선 5년 동안 ‘여의도 대통령’이라 불리며 정국을 지배해 온 ‘이회창 대세론’마저 깨뜨렸다. 2002년 12월 19일 그는 16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201만4277표(48.9%). 역대 대선 사상 최다 득표였다. 이날 밤 노 전 대통령은 “대화와 타협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일성으로 ‘노무현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유년 시절의 내 기억에서 봉화산과 자왕골은 빼놓을 수 없는 무대다. 나는 그곳에서 칡을 캐고, 진달래도 따고, 바위를 타기도 했다. 풀 먹이러 소를 끌고 나오는 곳도 항상 그 골짜기였다.”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167쪽)
봉화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삶과 어린 시절 꿈이 시작된 곳을 세상과의 이별 장소로 택했다. 윤회를 믿었음일까.

가난의 그늘
광복 이듬해인 1946년 9월 1일(음력 8월 6일). 노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노판석(盧判石)씨와 이순례(李順禮)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까마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가난한 마을이었고 작은 과수원을 하는 그의 집안도 가난했다. 대창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소농(小農)으로 생활수준은 하류(下流)’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노 전 대통령은 ‘공부 잘하고 말 잘하지만 자주 우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담임인 김정옥 교사는 생활기록부에 “각 과목 우수하고 성격도 활발하나 잘 운다”고 썼다. 중학시절 교사들의 평가란에는 ‘두뇌 명철, 성적 우수, 지도력, 진취성, 자주성, 정의감’ 등의 긍정적 표현 뒤엔 ‘비협조적ㆍ독선적ㆍ불안’ 등의 그늘진 평가도 뒤따랐다.

그만큼 ‘인간 노무현’의 성장 과정에 드리운 가난의 그림자는 짙었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시절 그는 항상 성적이 1, 2등을 다툴 정도였지만 학교를 못 가는 날이 많았다. 몸이 허약한 탓도 있었지만 ‘가사조력(家事助力ㆍ집안일 돕기)’ 등이 이유인 날도 많았다.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누나 영옥씨의 기억도 본인의 기억을 뒷받침한다. 6학년 때 일기장엔 “초가집이 변해 기와집도 될 수 있고, 흙 담장이 변해 벽돌담이 될 수 있다. 이뤄내고야 말겠다” “내가 크면 전 인류의 등불이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안 될지라도 단 10명의 등불이 될 것이다. 그게 안 되면 한 명이라도…”란 구절이 있다는 게 영옥씨의 기억이다.
가난의 편린들은 중학교 1년 휴학, 은행원을 목표로 한 부산상고 진학, 야간 경비로 일하며 학교에서 먹고 자던 부산상고 재학시절, 고교 졸업 뒤 농협 입사시험 낙방 등으로 이어졌다.

운명과의 승부
스무 살. 사법고시 도전은 가난 탈출의 승부수였다. 66년의 일이다. 고향마을 산기슭에 황토로 벽을 발라 직접 집을 짓고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한학을 한 부친 판석씨는 이 집에 마옥당(磨玉堂ㆍ옥을 가는 집)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어머니 순례씨는 ‘천상신장(天上神將)’의 위패와 관음상을 모신 제대(祭臺)를 만들어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기까지는 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의 한국비료 공장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군대도 다녀왔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연애를 시작한 건 제대 후였다. 같은 마을 출신인 권 여사는 낮엔 럭키(LG그룹의 모회사)에 나가 돈을 벌면서 밤엔 계성여상을 다니고 있었다. 양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8개월간의 구애 끝에 노 전 대통령은 73년 1월 권 여사와 결혼했다. 태중엔 이미 장남 건호씨가 있었다.

같은 해 5월 정신적 지주였던 큰형 영현씨가 교통사고로 죽는 충격과 가장으로서의 부담 등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그는 두 차례 연거푸 사법시험에 낙방했다. 당시의 부담감을 그는 훗날 “응시조차 포기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시선이 두려워 마지못해 상경했으나 시험 첫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라 우유와 계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래도 기를 쓰고 책을 볼라치면 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고 털어놨다.

애써 시작한 판사생활을 노 전 대통령은 7개월 만에 그만뒀다. ‘변호사 노무현’은 주로 등기업무ㆍ조세ㆍ회계 사건 등을 맡으며 돈을 벌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제적인 삶의 질 향상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도 “판ㆍ검사, 변호사가 되면 시골에 별장도 하나 갖고 모양 나게 산다는 게 우리 부부의 꿈이었다”고 말했다. 가난 탈출 목표엔 성공했다. 사건 수임엔 부산상고 인맥이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후회스러운 일도 적지 않았다. 변호사를 개업한 직후 한 아주머니가 남편이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며 변호를 의뢰해왔다. 노 전 대통령은 60만원에 사건을 수임했다. 한데 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합의를 봤다며 해약을 요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정이 급해 받은 돈을 이미 써버린 뒤였다. 돌려달라, 안 된다 승강이를 벌이던 끝에 그 아주머니는 “변호사는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라며 눈물을 흘린 채 돌아갔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나중에 자서전 머리말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내 삶의 영욕과 진실을 담보로 해 백발의 할머니가 됐을 그 아주머니에게 따뜻한 용서를 받고 싶다”고 부끄러워했다.

세상에 눈 뜨다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뜬 건 당시 부산 재야의 좌장격인 김광일 변호사의 요청으로 81년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다. 부산의 운동권 30여 명이 이른바 ‘좌경학습’을 하다 검거된 사건이었다. 처음 맡은 시국사건 변론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고문당한 상처를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온몸에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 있었고, 변호사인 나조차 믿지 못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고 술회했다. 72년 10월유신 때도 “헌법 책을 새로 사서 헌법 공부를 다시 해야겠구나” 했고, 79년 부마항쟁 때 동료 변호사들이 영장도 없이 잡혀갔다는 소식도 외면했던 그의 의식이 깨던 순간이었다.

이후 학생 운동권과 접촉하며 그는 생업을 팽개치다시피했다. 변호사 사무실은 문재인 변호사에게 맡겼다. 문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문 변호사는 그 시절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2002년 이렇게 회고했었다. “85년 5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창립대회를 경찰이 원천봉쇄했다. 노무현은 아예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85년부터 민중적 삶을 살겠다면서 승용차를 놔두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부민동 사무실 앞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다. 학생운동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학생운동 초기의 열정을 보여준 게 아닌가 한다. 나도 학생운동 출신이지만 사회에 나가면 점차 열정이 식는 게 보통인데 노무현은 반대였다.”

87년 대우조선 이석규씨가 시위 도중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사망하자 노 전 대통령은 거제도에 들어갔다가 제3자 개입 및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21일 만에 적부심에서 풀려났지만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명성이 퍼진 계기였다.



박승희,김정하,임장혁 기자 pmast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