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

김추기경의 삶과 철학

추억66 2009. 2. 17. 10:38

김추기경의 삶과 철학
"더 가난해야했고 더 사랑해야 했다"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강론, 1995년 7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우리나라 국민, 나아가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점철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를 초월해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거목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가 주교로 서임됐을 때 밝혔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사목 표어는 그의 삶과 철학을 온전히 대변하고 있는 것.

김수환 추기경의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소개된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가운데).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 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자 모친인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와 포목 행상을 하며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어머니는 자식들 교육에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해주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품을 받고 난 후 어머니와 함께한 모습.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 추기경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다"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그 길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을 명령을 받고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 유학길에 오른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던 김 추기경은 해방 이후인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당시 69세였던 모친은 벅찬 감격에 성당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이 광경을 지켜봤다고 한다.

1969년 4월 30일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추기경 서임을 받던 김수환 추기경 모습.
김 추기경은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돼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8년 5월 29일 대주교로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9년 4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로 당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한국 천주교회 2세기 만의 큰 경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기도 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이 전 세계를 통해 알려진 중요한 사건이었다.

2004년 김옥균 주교 금경축 감사 미사 도중에 한 어린아이와 함께한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미사 마침 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 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 표시를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전한다.

생전의 추기경은 소외된 이들의 벗이었다. 장애인과 사형수들을 거리낌 없이 만났고 강제 철거로 거리에 나앉은 빈민들, 농민과 저소득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1987년 4월 `도시 빈민 사목 위원회`를 교구 자문기구로 설립했다. 이후 서울대교구 복지시설은 150개를 훌쩍 넘길 정도로 성장한다.

김 추기경은 소탈하고 다정했다. 마산교구장과 서울대교구장을 거쳐 추기경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권위의식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는 것. 매춘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 복귀를 도와주고 있는 `막달레나의 집`과 관련된 일화는 추기경의 평소 삶을 보여준다. 김 추기경은 막달레나의 집 식구들에게 덕담과 함께 5000원씩 세뱃돈을 주곤 했다는 것. 여기에는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없었다. 이에 식구 한 명이 "어른은 좀 더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하자 김 추기경은 "나한테는 자네들이 다 어린아이라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격동의 한국 역사 속에 민족을 위해 사회 전면에 나서는 강직함도 보였고 조계종 길상사 개원 법회에 참석하는 등 이웃 종교를 감싸안는 넉넉함으로 시대를 밝히기도 했다. 정의와 사랑에 한평생을 바친 김 추기경이지만 그의 삶과 철학은 사랑에 좀 더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김 추기경은 은퇴 후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라고 밝혔다.

[문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