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시100

너를 기다리는 동안

추억66 2009. 2. 5. 16:15

 

[5]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 지 우
연인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 풍경'
장석남·시인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1985>

▲ 일러스트=클로이

기다리는 일이란 대체로 진을 빼는 일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고급한 형벌같다. 그래선지 세상의 모든 경전은 참고 기다리라고 가르친다. 우리같이 여염한 인간이 경전을 싫어하는 것은 바로 그런 가르침 때문이다. 어떻게 그 형벌을 이겨내는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 참으로 쓰디쓴 말이다.

이 시는 기다림이란 형벌 받는 자의 내면의 눈금이다. 심전도 검사 때의 그 그래프 같지 않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힐'때까지의 눈금의 급격한 상승, 그 클라이맥스에서 삼세번 아슬아슬하게, 불안하게, 순간적으로 '너'라며 이어지다가 급격히 눈금은 추락한다. 사랑을 앓는 자의 혈압. 그것을 추동하는 약속 시간과 맥박의 전개가 이 시의 매혹이자 기존의 '연애시'와 다른 '모던'함이다. '아주 먼 데'있는 사랑하는 이를 이렇게 기다리는 일을 우리는 고통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 시는 사랑의 시이면서 동시에 고통의 초상화다.

황지우(56)의 본명은 황재우다. 오타(誤打)가 나는 바람에 본명보다 훨씬 빼어난(?) 필명이 되었다. 어쩌면 그의 시업은 당대를 향해서 끊임없이 오타를 날리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오타의 문법은 공공의 통증을 유발하는 일종의 타작(打作)과 같은 것이었다. "내 마음의 마각(馬脚)이/ 뚜벅뚜벅 너의 가슴을/ 짓밟고 갔구나./ 사랑해!/ 라고 말하면서/ 나는 너를 다 갉아먹어 버렸어./ 내심(內心)의 뼈만 남은 앙상한 과실(果實)/ 묘판(苗板)에다가 너의 생을 다시 이장(移葬)하련다. 사랑해!" (〈나는 너다·333〉) 사랑은 때로 마각과 같은 것이다. 나의 사랑도 너에게, 너의 사랑도 나에게 솜사탕이 아닌 마각이라고 제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관성이 아닌, '사랑해!'라는 말의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어느 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를 외우고 다니는 주인공을 보았다. 그는 시인이었다. "여보, 지금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죽어가는 게의 꿈벅거리는 눈을 보고 올래?"(〈나는 너다·109〉) 그것이 황지우의 시였음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저게 무슨 말일까? 시를 공부하는 나도 의미가 떠오르지 않아 속으로 민망한 가운데 그러나 이런 것이 왔다. '죽어가는 게의 꿈벅거리는 눈'! 그것은 무엇인가. 하물며 그것을 혼자는 볼 수 없어 '여보'를 찾다니. 그 가없는 여림은 사랑이 마각임을 아는 자의 여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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