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그 여자네 집...김용택

추억66 2008. 9. 11. 10:38


그 여자네 집...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출처 : 동제 블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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