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66
2008. 2. 2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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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품다
촉촉한 새벽이슬 밟으며 연못으로 간다. 안개 걷히고, 푸른 연잎 일렁이는 못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가 뜨기 전에, 꽃 봉오리가 열리기 전에 꽃을 따야 한다. 지난 밤 꽃 봉오리 닫히기 전에 화심에 얹어둔 찻잎을 생각한다. 작은 베보자기에 담긴, 밤새 연꽃 향 품고 앉았을, 꽃잎 너머 아슴아슴 별빛도 함께 품었을 찻잎을 생각한다. 꽃은 차를 품고 차는 꽃의 향기를 품는다. 꽃을 딴다. 녹차 품은 연꽃을 딴다. 오래전 연꽃차를 만들던 운(芸)이처럼, 임어당이 중국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칭송하던 운이가 그랬던 것처럼. 해가 뜨고 서서히 꽃봉오리 벌어진다. 연꽃향도 함께 벌어져 연못가는 어느새 온통 연꽃향이다. 고인 물 더러운 냄새는 어디서도 맡을 수 없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다.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꽃이나 잎에 묻히지 않는 연꽃. 연꽃은 오히려 물의 오염물질을 흡수하여 양분으로 삼고 산소를 내뿜어 물을 정화한다. 꽃이 피면 물 속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가득하다. 훈훈한 입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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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손님들이 왔다. 멀리서 꽃을 보고 온 손님들이다. 손이 많으니 연꽃차 내기 좋겠다. 연꽃차는 저 혼자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커다란 꽃송이 하나 우려내면 적어도 열 사람이 먹을 만큼의 차가 나온다. 커다란 그릇에 연잎 깔고 차를 품은 연꽃 송이 올려 따뜻한 물 붓는다. 모아졌던 꽃잎 하나하나 벌어지고 노란 수술들 결을 고른다. 이윽고 퍼지는 백련향. 쌉싸래하면서 달콤한 향기다. 코끝을 간질이는 백련향은 청아한 여인을 닮았다. 안개처럼 몽연하게 나타났다가 단호하게 사라진 여인, 사그락사그락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진 여인, 끝끝내 잡히지 않을 한 여인. 손들은 안개처럼 사라진 여인의 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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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좇는다.
어느새 달콤한 향기는 그윽한 향냄새로 변한다. 그윽한 향냄새 끝에 번져오는 풍경 소리. 손들은 말없이 미소 짓는다. 부처가 설법은 하지 않고 곁의 연꽃 한 송이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홀로 미소 짓고 있던 가섭존자의 염화미소가 보인다. 차 한 잔을 앞에 둔 손의 마음은 연꽃 속에 차를 넣어둔 사람의 마음과 이미 통하고 있음이다. 꽃을 품는 것은 향을 품는 것이고, 향을 품는 것은 마음을 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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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를 짓다
성이 잔뜩 나면 연 밭에 갈 일이다. 둥글고 원만한 연잎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 항상 웃음을 머금은 인자한 사람 옆에 서 있는 느낌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화평해지는 너르고 둥근 이파리. 저 연잎 따다가 술 담가도 되겠다. 벌써부터 술 익는 냄새,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른다. 연꽃 속에 황금빛 연밥도 보인다. 연꽃은 꽃이 피는 것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잡는다. 꽃이 져야 열매 맺는 꽃과는 다르다. 연꽃 속에 든 연밥처럼 사람 일의 인과를 알 수 있다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속에 품었던 성을, 독기를, 화를, 한 송이 연꽃이 잦아들게 한다. 한 송이 연꽃이, 연꽃에 든 연밥이, 연꽃을 받치고 있는 연잎이 입가에 미소를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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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잎 떨어지고 나니 연밥 익어가는 게 보인다. 찹쌀에 연밥 연근 가득 넣고 연잎에 쌓아 쪄 먹을까, 연씨 속에 든 푸른 심지 빼내어 차를 담가 볼까, 자그마한 항아리에 연밥 넣고 연자주나 담가 볼까. 연밥 구멍마다 가득 찬 연씨 보며 풍족한 상상을 한다.
황새 한 마리 날아와 연씨 하나 물고 날아간다. 톡, 연씨를 정확히 찍어 날아가는 새가 밉지만은 않다. 싹틀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씨앗이 아쉽기는 하지만, 내년에도 연못 가득 연꽃 피어날 테다.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여건만 된다면 발아되는 생명력 강한 씨앗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명력이 강하다 해도 연씨는 스스로 싹트지 못한다. 반드시 제 몸에 상처를 받아야 싹이 튼다. 상처를 받음으로 새싹을 틔운다는 것을, 작은 연씨 하나로 배운다. 삼세인과를 생각한다. 과거 현재 미래에 인과응보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괜한 성을 냈다. 그저 마음을 편히 하고 미소를 지으면 성도 잦아들 것을. 살랑살랑 흔들리는 연잎처럼 편안해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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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에 들이다
마당 한가득 자리 펴놓고 누룩을 깬다. 밤새 이슬을 맞히고 낮에는 바싹 말리고 깨 볶듯 볶아 술 담글 누룩을 준비한다. 술항아리가 반쯤 비었으니 새 술을 담글 때다. 을유년이니 동쪽 남쪽 삼살방 낀 곳을 피해 독을 놓는다. 술 빚는 날과 시간, 술독을 놓는 방위까지 하나도 허투로 해서는 안 된다. 술은 사람의 지극한 정성을 먹고 태어나야 하는 법이다. 좋은 마음으로 청결하고 깨끗하게 빚어야 누군가에게 약주가 된다. 약을 달이는 마음으로 술을 빚는다.
극심한 가뭄에 백성들의 굶주림이 이어지자 5첩 반상 이상을 들이지 말라 명을 내린 임금의 너그러움이, 그러한 임금을 위해 몸에 이로운 술을 만들어 올린 신하의 지혜가 담긴 술이다. 연엽주는 다만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건강을 위한 술이다.
술을 따른다. 진한 갈색 물이 또르르 떨어진다. 연잎을 구르는 이슬처럼 청명한 소리가 난다. 술을 마신다. 정성을 마신다. 새곰하면서 끝에 단맛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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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의 쓴맛이 발효되면서 단맛으로 변했다. 쓰고 강한 맛이 누룩과 한 곳에서 단 맛으로 변한 것이다. 법정 스님은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고 말했었다. 그대 몸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고,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 잎을 안고 있다고,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고, 수천 개의 그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고. 연을 먹는다. 꽃을 먹고 잎을 먹고 뿌리를, 줄기를 먹는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연을 먹는 것 몸 안에 연 하나 키우는 일이다. 연을 먹으며 속으로 빌어볼 일이다. 그리하여 내 마음 안에 작은 연못 하나 가지기를, 그 속에 연꽃 하나 피울 수 있기를 소망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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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및 글 천운영| |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바늘』과 『명랑』 두 권의 소설집을 냈다. 2003년 신동엽 문학창작지원금을 받고 2004년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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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및 사진 이영균| |
대학에서 사진학을 전공하고 두어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잡지사 사진기자 등을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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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ong - justinKIM님의 | 착한 밥상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