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고흐와 고갱

추억66 2009. 8. 13. 14:14

  

고흐와 고갱_ 아를르의 노란집

 



Falling Autumn Leaves

1888

Vincent van Gogh

 

가을 낙엽이 지다_ 고흐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르의 화실에 머물렀던 당시에 그린 아를르의 풍경입니다.

 

 



Cafe Terrace at Night

1888

Vincent van Gogh

 

 

카페 테라스의 밤풍경_

역시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르의 화실에 머물렀던 당시에 그린 아를르의 풍경입니다.

이그림을 그릴 당시 빈센트는 바로 고갱과 함께 그의 아를르의 작업실에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뛰어난 재능으로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두 화가는 1888년 프랑스의 프로방스 시골 마을 아를에서 공동 작업실을 꾸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고흐의 그림속에 나오는 유명한 옐로하우스입니다. 예술사상 가장 유명한 동거 중 하나로 꼽히는, 고흐과 고갱이 함께한 60일간의 일상이 담긴 노란집_ 엘로우 하우스이지요.

 

 


The Yellow House
(September 1888)
Van Gogh Museum 

 

이 노란집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이 복원에 성공한 그림입니다.

이 집에서 고흐와 고갱이 함께 살았습니다.

아주 복잡한 동거였습니다.

 



Bedroom in Arles
(October 1888)
Van Gogh Museum

 

고흐가 그린

아를르의 침실입니다.

 

이 침대에서 둘이서 잤는지 교대로 잤는지 혼자 자고 다른 사람은 밑에서 잤는지 모르지만

이 작은 침대는 지구 위에서 가장 유명한 침실과 침대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기 개성이 뚜렷했던 두 화가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고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었는지를 서로에게도 감추었습니다.

 

 



The Night Café
(September 1888)
Yale

 

나이트 카페_ 고흐의 그림입니다.

1888년_ 물론 고갱과 함께 살던 무렵의 그림이지요.

 

 

빈센트는 아를르에서 무척이나 외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식당에서 주문하는거 이외에는 아무말도 못하며지내는 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정과 사랑도 그리웠고 다른 화가들과의 교류도 그리웠습니다. 그는 화가 에밀 베르나르와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으며 고갱에게도 가끔 편지를 썼습니다. 베르나르와 고갱에게 서로 자화상을 그려 나눠 갖자는 제의를 했고, 고갱은 자화상을 그려 빈센트에게 주었습니다. 그림에서 고갱은 자신을 장발장처럼 나타내려고했다는 편지와함께 그림을 보냈습니다. 거친 강도이긴하나 내면엔 고상함과 부드러움을 지닌 장발장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했다는것이지요.

 


폴고갱의 그림은 처음에는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의 영향으로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그리나 1887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마르티니크 섬으로 떠나 그림을 그리면서 인상주의와는 작별을 하게 되지요. 그는 이미 유럽의 문명이 오염되었다 생각했고 유럽이 잃어버린 건강한 원시성을 되찿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때묻지않은 타히티나 마르티니크 같은 외딴섬과 프랑스에서는 고립된 지역인 브르타뉴 지방에서 그림을 그렸지요... 차츰 미술의 정신과 생각을 중요시 생각한 그는 상징주의에 기울었습니다.

 

 



Vincent's Chair
(November 1888)

 

빈센트가 그린 의자입니다.

 


빈센트가 그린 <빈센트의 의자> <고갱의 의자>에서 보이듯 두 인물은 앉아있지 않지만 인물의 존재를 넌지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물이 인격을 지닌사람처럼 표현된것이지요. 빈센트와 고갱의 성품이 다르듯이 그림의 의자또한 다릅니다. 빈센트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시골농가의 이미지에 비해 고갱은 좀더 우아하고 화려한 안락의자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림에도 표현되었듯이 둘의 스타일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Gauguin's Armchair
(November 1888)
Van Gogh Museum

고갱이 그린 의자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_ 암스테르담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한사람은 폭발하는 화산이고, 다른한사람은 펄펄끓는 화산이다. 우리 둘 사이엔 이미 일종의 전투가 준비되고 있었다_ 고 고갱은 고백합니다. 그리고 고갱은 빈센트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그림을 판돈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성격이 맞지않아 빈센트와 함께 생활할수 없으니 파리로 가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둘다 마음의 안정을 되찿기위해서는 이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거듭 말합니다.


빈센트 또한 떠나려는 고갱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빈센트에게는 동생의 결혼소식도 큰 고민이였습니다. 결혼으로 인해 자신과 동생의 관계가 멀어질까 두려웠던것입니다. 경제적인면도 포함되있겠죠.


빈센트는 무척우울하고 외로웠답니다. 그러던중 사건이 터졌지요 이것은 고갱의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1888년 12월 23일 고갱이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을때 뒤에서 나는 발소리를 듣고 뒤를돌아보니 한손에 면도칼을 쥔 빈센트가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고갱이 그를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떨구고 다시 돌아갔다고 합니다. 다음날 빈센트가 귀를 잘랐다는 소식을 접하지요. 정확히말하면 귀전체가 아닌 귓볼을 잘랐다고 합니다. 일본에도 왜군들이 우리나라를 침입해서 귀를 잘라오던 무덤이 있지요. 예전 전쟁에서 병사가 적군을 죽인후 자신의 승리를 증명하기위해 적의 귀를 잘라오는 예가 있었다고하네요. 그리고 투우장에서 황소를 쓰러트린 투우사가 소의 귀를잘라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는 풍습도 있었구요 어쩌면 빈센트가 여러번본 투우경기의 투우사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본뜬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습니다.

 

 

고흐와 고갱_

그 두사람이 서로 대칭적으로 혹은 대위적으로 살았던  

간략한 삶을 둘러보겠습니다.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고갱은 파리에서 태어났으나 49년부터 55년까지 페루에서 살았다. 이후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다가 83년 해고되었고 그림은 1873년경부터 시작했다. 피사로를 통해서 인상파 작가들을 만났고 81년에는 세잔을 만나 함께 그림 그리기도 했다. 1888년엔 반 고흐와 함께 아를르에 머물렀는데 그는 자연에서 직접 그리는 것을 거부했고 자신의 상상력에서 그리기를 원했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oil on canvas
Boston Museum of Fine Arts, Boston, MA, USA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고갱의 그림입니다.

보스턴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The Spirit of the Dead Keep Watch, 1892,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비교적 잘 알려져있지 않은 고갱의 작품

저승사자의 정령

 

 


The Yellow Christ (Le Christ jaune)
1889, oil on canvas.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USA

  

고갱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황색의 예수그리도입니다.

 

 

아마 이런 점이 그를 인상파 작가들과 구분 지어주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될 것이다. 그는 관념적 세계와 환상적 주제를 좇아 현실에 투영하는 독특한 주제 의식을 가졌다. 종교적인 내용이나 심성이 이러한 주제를 꾸준히 발현하도록 한다. 또한 화려하고 장식적 색채와 평면적 화면 구성으로 반 인상파적 그림을 제작하고 원시적이고, 상징주의적인 화면을 이루어낸다. 타히티(Tahiti)에서 1891-93년, 1895-1901년까지 2차례에 걸쳐 지낸다.

 

 

Vincent van Gogh, c. 1876, photographer unknown

Vincent van Gogh, c. 1876, photographer unknown
 
사람들이 잘 접하지 못한 빈센트 반 고흐 사진입니다.
촬영자 미상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 1890)

1890년 7월 그는 자신이 발사한 총에 맞아 사망한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하나가 빈센트 반 고흐일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이지만 작가로서의 활동시기는 거의 프랑스 지역에서 맞는다. 다른 작가들보다 늦게 시작한 화가 경력은 자살로 비교적 일찍 끝나는데, 그는 작품집 못지 않게 다수의 전기와 많은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된다. 1886년 이후의 반 고흐의 생에 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의 정신질환을 문제삼으며 작품의 해석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리젤다 폴락(Griselda Pollock)은 반 고흐에 쏟아졌던 역사적 논의나 비평이 지나치게 그를 신비화 추상화했으며, 이러한 개인의 이미지를 통한 작품의 우상화가 얼마나 많은 오독의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지적한다. (Pollock, "Artists, Mythologies and Media: Genius, Madness and Art History," Screen 21: 3(1980), pp. 57-96) 반 고흐는 이제껏 보히미언적 열정과 광기가 섞인 천재의 이미지로 대표되어왔다. 이러한 접근이 작품의 해석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왔는데, 특히 그의 주제와 스타일의 문제로 결부되어 왔다.

 

 

 

그가 정신병원의 치료를 받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과연 그 병세가 작품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는가에 대해 폴락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작가의 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강도의 질병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주장은 당시 반 고흐를 담당했던 의사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다. 동생 테오에게 "...정확히 그의 증세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지만 아마 간질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쓴(1889 5) 그의 진단은 여러 번의 자해와 발작을 설명하는 유일한 증거이다.(Eisenman, p. 290)

 

 

 

작가도 동생에게 "내 의사가 이야기했듯이 난 진짜 미친 것이 아닌 것 같다. 발작이 없을 때에는 정말 아주 평화롭고 안온하다. 그러나 이런 증세를 보이는 그 순간에는 난 의식이 없다."(The complete Letters of Vincent Van Gogh, Greenwich, 1979. Letter 610) 라고 이야기함으로 우리가 생각했듯이 그가 상당히 심한 정신 착란을 앓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설사 그의 병세가 알려진 것보다 복잡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병명과 그의 작품과의 관계는 더 이상 논의의 초점이 될 수 없다. 이제 반 고흐에 관한 연구는 개인적 전기의 과장된 측면에서 벗어나 다른 접근법을 요구함에 분명하다. 작가와 작가성에 대한 관념성의 비판은 반 고흐뿐 아니라 많은 모던 작가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출처;tong.nate.파랑나루>